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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호 2023년 7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총 난민 인정 건수 1368건, 절반은 그 뒤에 ‘피난처’ 있었다

이호택 민간난민지원센터 ‘피난처’ 대표

총 난민 인정 건수 1368건, 절반은 그 뒤에 ‘피난처’ 있었다

이호택 (법학79-83)
민간난민지원센터 ‘피난처’ 대표



인권변호사 꿈꿨던 NGO 활동가
창의적인 서울법대인에 선정돼

지난 5월 31일 법대동창회 정기총회, 만찬 시작 직전 김종섭 본회 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손이 떨리는 불행 때문에 원하던 법조인이 되지 못한 이호택 동문이 외려 난민들을 돕는 더 훌륭한 길을 개척한 인생 스토리에 감동했다”며 즉석에서 사단법인 피난처에 1000만원 기부를 약속한 것. 앞서 진행된 창의적인 서울법대인 시상식 못지않게 큰 박수가 쏟아졌다.

이호택 동문이 1999년 설립한 사단법인 피난처는 난민 신청 절차 및 인정 절차의 법적 프로세스를 돕는 법률지원팀과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숙소·생계·의료 문제를 돕는 생활지원팀, 난민 이슈에 대해 교육하고 여러 프로젝트를 만들어 추진하는 교육협력팀으로 구성돼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2000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난민 인정이 되고 최근까지 누적 인정 건수는 1368건, 그중 절반은 피난처의 지원이 있어 가능했다. 애초에 노동인권 변호사가 되길 희망했으니 뭘 해도 어려운 사람들 돕는 일을 했을 것 같긴 한데, 왜 하필 난민지원 사업에 뛰어들었을까. 6월 28일 서울 금천구에 있는 피난처 사무실에서 이호택 대표를 만났다.

“제가 원해서 시작한 일이 아닙니다. 난민지원 사업을 하게 된 동기는 난민 같은 경험을 하게 된 데서 비롯했어요. 저 공부 열심히 했거든요. 모교 법대 나와서 사법시험에 떨어질 거라곤 생각지 못했죠. 원인 불명의 수전증 때문에 2차 시험을 제대로 치를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나 박해를 피해 강제적·비자발적 이주를 해야 했던 난민들처럼, 저도 강제적·비자발적으로 뜻을 접고 다른 진로를 찾아야 했어요. 나의 재능으로 어떤 봉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갖고 최선의 선택을 좇다 보니 지금에 이르게 됐습니다.”

국내에서 난민 이슈는 2018년 5월 500명이 넘는 예멘인들이 제주도로 입국, 난민 신청을 하면서 처음 환기됐다. 이를 계기로 국민적 논의 없이 몇몇 선각자들의 주도하에 2012년 제정된 난민법이 대중에 알려졌고, 난민 수용 여부에 대한 찬반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당시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난민 신청 허가 폐지’ 청원이 올라와 70만명의 동의를 얻기도 했다.

“낯선 문제에 직면하니 놀라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사회적 여론이 형성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설문 결과를 보면 찬성과 반대는 각각 20%고, 나머지 60%는 난민 심사를 엄격히 해서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은 보호하자는 입장이에요. 난민 제도의 악용을 우려하는 것이지, 난민 자체에 대해선 호의적인 겁니다. 솔직히 악용될 여지가 있긴 해요.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이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게 해놨거든요. 거짓으로 꾸며 난민 신청을 해도 심사하는 동안은 비자 없이 국내 체류가 가능하고 1인 가구 기준 월 43만원의 생활비가 최장 6개월간 지급됩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비를 지원받는 경우는 난민 신청자의 약 5%. 노약자나 아이를 부양하는 여자가 아니면, 대다수 난민 신청자들은 ‘알아서’ 생활비를 마련해야 한다. 난민으로 인정되면 사회보장기본법,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서 정한 내국인과 비슷한 수준의 복지혜택을 받을 수 있다. 국민 세금 걷어 난민에게 선심 쓴다고 힐난하지만, 2020년 기준 한국의 난민 정책 관련 예산은 24억6700만원으로 정부 총예산의 0.0004%에 그치며, 절반 이상은 난민 심사 때 통역비나 출장비 등 행정 비용으로 쓰인다.

“일각에선 난민을 받아주면 문화적 종교적 차이에서 범죄가 많아질 거라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사지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에요. 체류국에 밉보이면 강제송환돼 죽을 수도 있는, 한 마디로 ‘을’인 거죠. 출신국에서 생명을 위협받았던 사람들이기에 고국의 관습을 맹종하지도 않습니다.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수염도 밀고, 엎드려 절하는 예배도 한국에선 안 해요. 죄를 지으면 체류 기한 연장 및 난민 인정 등에 불이익을 받게 되니 몸을 사리죠.”

국내 난민 신청 건수는 난민법 시행 이후 크게 늘어 2018년 1만6173건, 2019년 1만5452건을 기록했다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2021년 2341건으로 급감했다. 현재는 엔데믹에 접어들면서 2022년엔 1만1539건으로 크게 늘었다. 지난해 난민 인정 건수는 175건. 신청 건수 대비 1.5%에 불과하다. 국내 난민 인정률은 준난민으로 분류되는 인도적 체류자를 포함해도 약 8%, 소위 ‘가짜 난민’이 심사를 통과할 가능성은 ‘0’에 가깝다. 이 대표는 난민의 성공적 정착이 국내 총생산을 확대한다고 말했다.

“2001년 인도적 체류자 신분을 취득한 이라크 쿠르드족 출신 이스마엘 메르샴 박사는 한국외대에서 아랍어와 쿠르드어를 가르쳤습니다. 2003년 자이툰 부대가 이라크에 파병됐을 때 가이드 및 현지 통역을 맡았죠. 2008년 난민 인정을 받은 콩코민주공화국 출신 욤비 토나 교수는 난민네트워크 의장으로 활약했고, 그의 아들 조나단은 방송인이자 유튜버로서 우리 국민에게 큰 웃음을 주고 있습니다. 그 가족들 덕분에 저는 콩고의 대표 간식 ‘미카테’를 알게 됐고 먹을 수 있게 됐죠. 언어, 음식, 음악 등 여러 측면에서 국내에 정착한 난민들의 문화가 우리의 귀한 자산이 되는 겁니다.”

돌아보면 한국 근현대사는 우리 민족이 난민으로 살아온 역사를 특징으로 한다. 한국전쟁 때 해외로 피난 간 국민은 물론이고, 일제강점기 땐 김 구 선생이, 군사 독재 시절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주로, 미국으로 떠나 난민으로 살았다. 난민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곧 난민으로 살았던 우리에 대한 자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1%대 난민 인정률에 대해 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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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