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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호 2021년 2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곳간지기의 역할

김정곤 한국일보 논설위원·본지 논설위원


곳간지기의 역할

김정곤
사회87-94
한국일보 논설위원·본지 논설위원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1년 넘게 지속되면서 서민 경제가 파탄지경이다. 회사 근처 남대문시장 어떤 골목에는 한 집 건너 하나꼴로 ‘임대’ 팻말이 나붙어 있다. 서울 도심의 수십 년 된 유명 음식점들이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폐업하는 마당이니 일반 카페나 영세 식당 주인들은 오죽하겠는가.

연초 여권에서 ‘손실보상제’를 공론화할 때만 해도 서민들의 피눈물에 공감하는 정치권 배려가 따뜻해 보였다. 경제 부총리가 “국가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라고 저항하자 국무총리는 “이게 기재부의 나라냐”고 격노하면서 코로나로 피해 입은 서민 편을 들었다. 여당은 50%를 밑도는 국가부채비율을 제시하고 ‘세계 최고로 건강한 곳간’을 열자고 분위기를 잡았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이후 논의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코로나 손실 보상에 최대 100조원이 드는 법안과 적자 국채 발행이나 소비세 인상 등 나름의 묘책만 난무했다. 그러다 손실보상제는 ‘피해 산정기준 등의 난제로 신속한 지원이 어렵다’는 한 마디와 함께 향후 입법과제로 사라지고 말았다. 많은 국가들이 법제화하지 못하는 이유를 외면하고 재원 마련을 위한 사회적 합의도 없이 설익은 장밋빛 청사진부터 꺼낸 부실정책의 결과다. 그리고 피해 서민들은 지독한 희망고문을 당해야 했다.
민심을 달래기 위한 국면전환 카드가 필요했던 것일까. 이번에는 전 국민 재난지원금과 취약계층 선별 지원을 동시에 추진하는 방안이 나왔다. “다다익선보다 적재적소가 우선”이라며 확대재정을 견제하는 부총리는 또다시 개혁 저항세력이 됐다. ‘정부는 재정 건전성의 확보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국가재정법상 책무를 막중하게 생각하는 부총리 신세가 말이 아니다.

1979년 박정희 정부 때 일이다. 지금의 기재부인 경제기획원이 3만호 규모의 농가주택 개량사업을 보고하자 대통령이 “6만 가구는 해야 되는 거 아니오”라며 정색을 했다. 싸늘해진 회의 석상에서 “재정 부담 때문에 안 됩니다”라는 신현확 부총리의 답변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이후 대통령이 “농업개발에 대한 내 신념을 꺾을 작정이오”라고 서슬까지 세웠지만 부총리는 ‘재원 배분 원칙상 그럴 수 없다’는 소신을 지켰다고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곳간지기의 역할이 크게 다르지는 않을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