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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2020년 10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호모 에루디티오와 나훈아

김영희(고고미술88-92) 한겨레 총괄부국장, 본지 논설위원

호모 에루디티오와 나훈아

‘가황’ 나훈아가 언택트 콘서트에서 했던 말 한마디 한마디에 SNS 공간이 시끄러웠다. 그런데 회사에서 정년퇴직하는 선배들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일까, 정치적 논란이 된 말들보다 마음에 꽂힌 건 이 말이었다. “우리가 세월의 모가지를 딱 비틀어서 끌고 가야 한다.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하면 세월한테 끌려가는 거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고 안 가본 데도 한 번 가 봐야 한다. 안 하던 일을 해야 세월이 늦게 간다.”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이 본격화되면서 전문가들의 노후설계 조언이 넘쳐난다. 대부분은 노후 적정자산이나 연금 불리기 방법 같은 내용이다. 가끔 정년 뒤 봉사의 삶을 살거나 산골로 들어가 농사짓는 유명인사 사례에 감동받지만, 솔직히 재능 있고 여유 있는 이들의 이야기라고 느껴질 때가 많다. 작더라도 구체적인 목표와 계획이 없는 노후설계는 공허하다.

어느 날 7살 터울 남편이 적금 하나를 따로 붓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주식도 부동산도 평생 흥미 없던 사람인데 몇 년 뒤면 정년이니 가계를 책임질 아내를 생각해 목돈을 마련해두려나, 순간 ‘계 타는’ 기분마저 들었다. 착각이었다. “퇴직하면 혼자 차 끌고 세계일주 하려고 모으는 돈이야.”

하긴 우리 부부는 늘 ‘60살까지 일하고 몸이 건강한 70살까진 열심히 놀자’고 다짐하곤 했다. 그러니 퇴임 뒤 내 정년까지 7년을 기다리라 할 순 없는 일이다. 남편은 주말이면 차박과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독파하기 시작했다. 간단한 정비기술은 갖춰야 한다며 자동차 정비 공부를 하고, 세계를 누비는 계획을 세운 김에 스페인어, 러시아어 독학도 틈틈이 진행 중이다. 따로 돈 들이지 않아도 마음만 먹으면 유튜브엔 공부할 수 있는 콘텐츠가 널렸다.

평생 배우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로 살기가 그 어느 때보다 쉬워진 시대, 코로나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은 곁에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다. ‘독자 계획’을 세운 남편이 여전히 얄밉지만, 나보다 한발 앞서 ‘세월에 끌려가지 않는 법’을 연습하는 그를 응원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