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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1호 2020년 10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천재가 나올 수 없는 나라

이준구(경제68-72) 모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천재가 나올 수 없는 나라


지적 호기심에서 천재성 싹터
시험 줄이고 사색할 시간줘야

2006년 31살의 나이로 수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메달을 수상한 타오(T. Tao)는 어릴 때부터 뛰어난 천재성을 보였다. 그는 아홉 살에 대학 수학과목을 수강했고, 열 살 때에는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 출전해 동메달을 땄다. 그 다음해에는 은메달,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금메달을 땄는데, 그때의 나이가 열두 살이었다. 대회 역사상 금·은·동메달 모두 그가 최연소 수상자의 기록을 세웠다.

우리나라에도 국제수학올림피아드 금메달 수상자가 꽤 많지만, 타오처럼 대스타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없다. 비록 수학뿐 아니라 어느 학문분야를 보아도 우리나라 출신의 천재 학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경제학 분야만 하더라도 국제적으로 이름난 고만고만한 학자가 꽤 있지만, 스티글리츠(J. Stiglitz)나 크루그먼(P. Krugman) 같은 스타급 경제학자는 이제껏 배출된 바 없다.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학문의 세계에서는 보통의 능력을 가진 열 명의 학자가 한 명의 천재를 이길 수 없다. 학문의 프론티어를 개척해 가는 것은 언제나 뉴턴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들의 몫이었다. 어떤 학문이 발전해온 역사는 기라성같은 천재들의 화려한 퍼레이드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퍼레이드에서 우리나라 사람의 자랑스러운 얼굴을 찾아보고 싶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이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세계 여러 나라들 중 어린이들이 공부 열심히 하기로 따지면 우리나라를 넘어서는 나라가 하나도 없는데. 청소년들 학업 성취도의 국제비교를 보아도 우리나라가 최상위권에서 떨어져 본 일이 없다. 이렇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잘하는 청소년들인데, 왜 성인이 되어 무한경쟁의 장으로 들어가면 이내 쪼그라들고 마는가? 오히려 우리보다 잘살지도 못하고 인구도 더 적은 나라에서 가끔 스타들이 나오곤 하는데 말이다.

내가 보기에 문제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공부를 너무 많이 시키는 데 있다. 간신히 말문이 트인 어린애를 영어 학원으로 내몰아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교육 아니던가? 초등학교 때부터 이미 ‘수학의 정석’을 공부해야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눈만 뜨면 공부, 공부하면서 들볶아대니 공부라는 말만 들어도 신물이 날 게 뻔하다. 이런 상황에서 지적 호기심이 싹튼다면 그건 기적 중에서도 최고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서른둘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인도의 천재 수학자 라마누잔(S. Ramanujan)은 정식 수학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어릴 때 과일가게 앞을 지나다가 오렌지가 층층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고 수열을 생각해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렇게 천재성은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지적 호기심에서 그 싹이 트는 법이다. 공부하라고 몰아대는 부모의 성화는 오히려 지적 호기심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역효과를 낸다.

우리 사회에서도 가끔 ‘신동’이라는 말을 듣는 어린이들이 나타나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 중 진정한 천재로 성장한 경우는 하나도 본 적이 없다. 부모의 욕심으로 선행학습을 통해 억지 신동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동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오히려 지적 호기심이 퇴화해 버리는 비극이 발생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행하는 선행학습은 어린이들의 지적 호기심을 말살해 버리는 암적 존재다.

우리 교육은 천재는커녕 창의성 있는 인재조차 키워내지도 못하는 형편이다. 대학 수시모집제도를 도입한 명분 중 하나가 창의성 있는 인재를 찾아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대학에서 가르쳐본 경험에 따르면, 수시모집제도 도입 이후 들어온 학생이 더욱 창의적이라는 느낌이 결코 들지 않는다. 그저 시험성적에만 연연하는 모습이 예전보다 더 심하면 더 심했지 나아진 점을 전혀 찾아보기 힘들다.

나는 우리 교육의 문제가 쓸모없는 공부를 너무 많이 시킨다는 데 있다고 본다. 예컨대 내가 고등학교 때 배운 수학은 그 후의 내 인생에서 하등 쓸모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인수분해하는 방법을 터득하느라 내 청춘을 바쳤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런 데 쓸 시간을 동서고금의 고전을 읽는 데 썼다면 좀 더 창의적인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스스로 생각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창의성 있는 인재를 키워낸다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다.
뿐만 아니라 재미없는 공부만 강요하는 우리 교육은 모두를 불행한 사람으로 만든다. 청소년들의 행복감에 관한 국제비교를 보면 우리가 늘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 교육의 문제는 비단 공교육의 문제만이 아니다. 경쟁에서 이기기만을 요구하는 학부모들의 가정교육이 갖는 문제가 더욱 심각한지도 모른다. 우리 어른들이 대오각성하지 않는 한 공부에 찌든 불행한 청소년들의 행진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