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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호 2020년 9월] 기고 에세이

뉴노멀의 선진국, 새로운 가치 시스템을 세우자

김재인 경희대 학술연구교수
뉴노멀의 선진국, 새로운 가치 시스템을 세우자

김재인
미학89-93
철학자
경희대 학술연구교수

여름의 끝에 코로나19 재확산세가 심상치 않다. 모두가 봄에 마련했던 행동 지침을 다시 따르기 시작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더 강화되고, 학교는 원격수업으로 돌아가고, 회의와 강연은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전환되고, 재택근무가 확산되고, 절망과 탄식 속에서 당장 올 가을은 물론 내년까지도 이 상황이 계속되겠구나 하는 한숨이 터져나온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새로운 규범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변은 일상이 되었고, 이상은 정상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뉴노멀이다.

나도 ‘녹두거리에서’라는 코너를 청탁 받고, 학생 시절의 추억이 한 자락이라도 떠올라야 했건만, 학생이 사라진 캠퍼스와 학교 주변만 생각난다. 청춘의 특권과 낭만은 사라지고, 손톱보다 조금 큰 얼굴들만 모니터에 빼곡하다. 더욱이 미래마저 불확실하고 암담하니 걱정이 끊이질 않는다.
꼰대가 된 걸까? 아니, 그보다 현재 상황이 2년 넘게 계속될 때, 대학이 무슨 의미일지 의문이 앞선다. 강의실과 캠퍼스와 주점이 없는 대학이라? 교수도, 친구도, 선후배도, 연인도 없는 대학이라? 라떼(나 때)는 말이야… 독재와 싸우고 문화를 세우고 공부도 치열했던, 라떼는… 부딪침이 있었고, 만남이 있었고, 숨결이 느껴졌던, 라떼는…

정신 차리고 시야를 넓혀 바다 건너를 살펴본다. 그곳은 더 가관이다. 한국이 봄에 겪었던 상황이 멈춘 적 없이 계속되고 있다. 아니, 그저 계속되는 게 아니라 악화일로에 있다. 한국의 상황이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끝자리 숫자 0을 한두 개 빼도 될 정도의 규모이다. 행성적 관점에 서면, 지금까지 한국은 코로나바이러스를 가장 잘 관리해왔다.

방역은 과학과 민주주의의 문제다. 과학은 질병에 대한 분석과 예측이, 민주주의는 삶의 가치에 대한 공동체의 의사결정과 결단이 핵심이다. 감염병은 공동체 전체를 대상으로 공격한다. 바이러스는 묻는다. ‘병에 걸려 빨리 죽을래, 생계를 잃고 천천히 죽을래?’ 상황이 어찌돼도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정규직의 처지에서 방역 정책을 평가하면 오류를 범하고 만다. 소상공인과 비정규직 입장에 서야 고민의 본질이 보인다. 이 점에서 영화 ‘극한직업’의 끝에 나오는 대사는 마음을 때린다. “소상공인들은 목숨 걸고 장사해!” IMF 때 자살로 내몰린 한 명 한 명의 입장에 서야 한다. 회생 불가능성이라는 절벽 앞에서는 최대한 천천히 갈 수밖에 없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살리려면 무엇이 최선일까?’

선진국이란 무엇인가? 인류가 가지 않은 곳을 가장 먼저 가면서 길을 만드는 나라이다. 한국은 뉴노멀의 선진국이다. 격에 맞는 가치 시스템이 필요하다. 서양 근대의 가치 시스템은 시효가 다했다. 바이러스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바이러스는 지구를 돌고 돌아 모두를 방문한다. 뉴노멀은 필연이다. 감염병은 강요한다. ‘함께 살래, 아니면 다 죽을래?’ 이 앞에서 ‘협력과 연대’ 말고 다른 길은 없다. 업그레이드된 가치 시스템은 공동체 구성원 하나하나를 배려해야 한다. 한국에 살면 적어도 이 수준 이상의 삶은 보장되어 있다고 자부할 수 있어야 한다. 뉴노멀의 새로운 가치 시스템은 이렇게 건설되기 시작해야 한다.


* 김 동문은 모교 미학과 졸업 후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모교 철학사상연구소 객원연구원, 고등과학원 상주연구원 등을 지내고 현재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학 강의, 대중 강연, 저술 활동을 펼치며 저서 ‘뉴노멀의 철학’, ‘생각의 싸움’,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역서 ‘안티 오이디푸스’ 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