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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호 2020년 8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쓸모 너머의 아름다움

나성인 클래식 칼럼니스트


쓸모 너머의 아름다움




나성인
소비자아동99-04
클래식 칼럼니스트



2020년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의 해다. 올해는 횔덜린과 헤겔, 셸링의 해이기도 하다. 나는 모종의 기대감을 가지고 올해를 맞이했는데, 그것은 스무 해 전 기억의 탓이 컸다.

내가 대학생이 된 1999년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 탄생 250주년의 해였다. 평소 문학에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갓 고등학생 티를 벗은 신입생이 무슨 괴테를 알았겠는가. 별 생각 없이 전영애 교수님의 ‘독일 명작의 이해’에 수강신청을 했고, 뭘 해도 어수선한 신입생 시절의 즉흥성으로 괴테 250주년 기념행사에까지 가게 되었다. 어느 극장을 빌려 괴테 시를 낭송하고 가곡 몇 곡을 듣는 조촐한 독회였다. 우리나라처럼 먼 곳에서까지 시인 괴테를 기념한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는 소박한 회합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모임이 담백하다 보니 오히려 괴테의 언어가 더 귓가에 다가왔다. 시 외에는 마음을 끌 만한 다른 게 없었던 까닭이었다. 연출가 문호근 선생님의 ‘파리아’(인도의 설화를 바탕으로 인간의 구원과 사랑을 다룬 장시) 낭송도, 오랜만에 실제 연주로 듣게 된 슈베르트의 가곡 ‘마왕’도, 시 앞에서는 늘 소녀와 같으셨던 전영애 선생님의 괴테 이야기도 잔잔하나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때 나는 시의 무용성(無用性)과 거기서 나오는 진정성을 처음으로 경험했다. 시란 사실 ‘쓸데없이 예쁜 말’이다. 괴테 250주년이 이 바쁜 서울 한복판에서 대체 무슨 쓸모가 있었을까. “이것은 영영 시들고 마는 영원한 사랑의 증표입니다”와 같은 멋진 구절을 연애편지에 써 먹을 요량으로 잘 베껴 놓는 게 전부 아닐까. 하지만 그 ‘쓸모없는’ 독회에서 낭송된 ‘쓸데없이’ 아름다운 말들은 내게 넌지시 일러주었다. ‘쓸모’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배움의 내용이라고 말이다. 시란 쓸데가 없기 때문에 비로소 아름다워진다. 쓸모 너머를 볼 줄 아는 시선을 연습시키기 때문이다. 사람도 쓸모와 관계없이 볼 때 좋은 법이다. 아름다움이란 늘 쓸모 너머에 있는 것이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기대했던 베토벤의 250주년은 코로나19로 인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몇 해 전 베토벤 교향곡을 주제로 졸저를 낸 뒤, 강의하고 글 쓰는 삶을 살고 있던 내게도 이런 상황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그간 다른 이에게는 여가인 음악 듣기나 책 읽기가 내게는 쓸모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문자와 음악 사이, 외국어와 우리말 사이, 읽기와 듣기 사이를 연신 오가며 중간자적 지식을 옮기는 일로 나는 가장 노릇을 했고 아이들도 별 일 없이 이만큼이나 자랐다. 그런데 코로나가 터지자 나는 금세 내 지식의 무용성을 겪게 되었고, 내가 쓸모와 아름다움 사이 어디쯤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묻게 되었다.

위대한 베토벤도 멈춰선 때가 있었다. 귓병을 딛고 만인을 위한 자유를 불꽃같은 음악 속에 담아내던 그였지만 왕정복고의 좌절, 사랑의 상실, 도덕적 실패의 3연타를 얻어맞고 침묵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합리적이어야 사회가 발전한다는 계몽의 정신이나 모든 것 위의 자유를 부르짖는 혁명의 사상이 한낱 뜬구름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미래를 알 길 없는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던 베토벤은 이 같은 차가운 현실 앞에서 자기 음악의 무용성을 맞닥뜨렸다. 그러나 공화제의 지지자요, 예술가로서의 자기 증명 욕구를 내려놓았을 때 베토벤은 보다 아름다운 뜻을 발견했다. 곧 혁명이나 음악가의 자유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더 먼저임을 깨달은 것이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과 ‘장엄 미사’와 마지막 현악사중주들은 다 이런 깨달음에서 나온 작품들이며 우리는 이 만년의 걸작이 없는 베토벤을 상상할 수 없다.

쓸모와 효용을 한참 추구해 오던 우리는 지금 멈춰 서 있다. 자신의 쓸모없음과 만나는 순간 좌절 대신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인간은 품위가 있다. 우리의 성취와 진보를 반성적으로 살피게 되는 이때, 베토벤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긴 ‘쓸모 너머의 음악’을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올해는 진정한 의미에서 베토벤 음악을 만나기 가장 좋은 시절인지도 모른다.



*나 동문은 모교 소비자아동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서 독일시를 전공, 독일 아우크스부르크대에서 문학과 음악의 관계를 연구했다. 가곡의 시적 해석을 돕는 문학코치, 클래식 칼럼니스트, 공연기획자로 활동하며 조수미, 연광철 등 독일가곡 음반의 시를 번역했다. ‘베토벤 아홉 개의 교향곡’, ‘괴테와 발라데’(부분)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