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호 2005년 5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밀거래로 훼손된 북한 문화재
2005년 3월 6일 오후 6시. 중국 단둥으로 향하는 1만6백여 톤급의 동방명주호가 미끄러지듯 인천항 부두를 떠났다. 보따리상들과 조선족들로 떠들썩한 배 안과 달리 해가 떨어지기 직전의 어둑어둑한 서해 바다는 힘이 없어 보였다.
묘한 감정에 빠졌다. 일종의 두려움 같은. 북한에서 밀반출된 `우리 문화재'가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일본으로, 제3국으로 반출되는 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낯선 사람들 속에 끼어든 것이다.
"국보급 청자 수십 점이 한국에 들어왔다." "식량난에 박물관 문화재까지 내다 판다." "개성 일대가 도굴로 쑥대밭이 됐다." 서울 인사동과 장한평 일대에서 북한 문화재 밀거래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어떤 물건이 어떤 통로로 거래되고 있는지 실상은 베일 속에 갇혀 있었다.
선배들과 함께 신분을 숨긴 채 진행됐던 007작전 같은 취재. 주요 거상들을 직접 만나고, 밀반출과 거래 루트를 꼼꼼히 짚어 가는 길에서 뭔가를 해낼 것이라 믿었지만 첫날부터 쉽지 않았다. 보따리 속에 한국에서 팔지 못한 문화재를 챙겨 넣고 단둥을 향하는 골동품 상인을 찾아 여객터미널을 샅샅이 뒤졌지만 헛수고. 보따리 장사들에게 하나라도 더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여행 온 대학생을 가장해 배 안을 휘저었지만 소득이 없었다. 15시간의 밤을 꼬박 지샌 여정. 뱃멀미로 탈진 직전 상태에서 단둥에 도착했다. 압록강과 두만강 물줄기를 따라 단둥과 롱징, 투먼 등에서의 밀무역 현장과 선양, 옌지, 베이징 등 북한 문화재가 팔려 다니는 거래 시장까지, 11일간의 장도에서 확인한 도굴과 밀거래로 훼손된 북한 문화재는 남북 분단의 또 다른 희생물이었다. 역사의 혼과 선조의 얼이 깃든 `우리 문화재'는 개성의 무덤에서, 의주의 사찰에서, 평양의 박물관에서, 그리고 평범한 가정집에서 아무렇게나 파헤쳐져 이국 땅을 헤매고 있었다.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날 베고 자던 베갯모까지 뜯어 파는 인민들, 조선중앙박물관과 개성박물관 창고에 좋은 골동품이 산적해 있으니 얼마든지 사가라며 외화벌이에 나선 북한 고위관리들…. 중국 현지의 한국 상인들은 중국 골동품 중개 거래 시장의 주도권을 모두 중국 상인들에게 빼앗긴 채 피폐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두려움이나 호기심보다 답답함과 분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언젠가 고향집에 놓인 곰팡이 냄새나는 골동품에 얼굴을 찡그릴 때 우리의 옛 것이 예쁘게 보일 때, 그 때가 철 들 때다라던 아버지의 말씀. 그 옛 것들이 예쁘게 보일 겨를도 없이 안쓰럽고 측은하게만 느껴지는 속앓이는 출장에서 돌아와서도 가실 수가 없었다. 한국 골동품 상인들은 보도를 막았다. 주요 거래가 막히면 북한동포와 불경기로 시름하는 남한 골동상인들의 밥줄이 끊어진다는 논리였다. 왜 `우리들의 문화재'를 한민족끼리 몰래 들여와서 몰래 팔아야 하나. 우리 문화재가 중국을 거쳐 일본, 유럽으로 남몰래 팔려 나가는 것도 속상한데, 넘쳐나는 가짜 골동품 때문에 국제시장에서는 자칫 중국 골동품의 아류로 전락할 처지에 놓였다.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팔려 다니는 북한 문화재의 주요 거점과 경로, 거래 가격과 역사, 거상들에 대한 상세한 취재 내용을 모두 쓰면 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밥줄이 위험해질 텐데. 시리즈 기사가 두 차례 나간 뒤 인사동 상인들로부터 중국 국경 경계가 강화돼 골동품이 단 한 점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들었다. 분단으로 인한 한반도의 또 다른 상처. 당장 지금은 아플지라도 우리 역사의 아픔은 면밀히 기록해야 한다. 냉정해져야 한다. 두 달간의 국내 취재, 열흘간의 해외 취재, 한달간의 보도. 지난 3개월간 선배들과의 밀착 취재기간 초기엔 흥분했다. 우리 문화재가 이렇게 버려지고, 훼손되도록 방치해도 되는가. 북한당국이나 우리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다는 건가. 화가 났다. 그러나 기자는, 객관적 관찰자다. 아직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은 3년차 새내기 `기자'. `기자가 되고 싶다'가 아니라 `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순간. 지난 3년 약간은 무뎌진 그 첫 마음은 신기하게도 지난 석달간 밤잠을 설치며 역사와 민족, 기자의 임무에 대해 고민을 하는 사이 조금씩 되살아난 것 같다. 나의 북한 문화재 밀거래 취재는 안타까움을 남긴 채….
선배들과 함께 신분을 숨긴 채 진행됐던 007작전 같은 취재. 주요 거상들을 직접 만나고, 밀반출과 거래 루트를 꼼꼼히 짚어 가는 길에서 뭔가를 해낼 것이라 믿었지만 첫날부터 쉽지 않았다. 보따리 속에 한국에서 팔지 못한 문화재를 챙겨 넣고 단둥을 향하는 골동품 상인을 찾아 여객터미널을 샅샅이 뒤졌지만 헛수고. 보따리 장사들에게 하나라도 더 들을 수 있을까 싶어 여행 온 대학생을 가장해 배 안을 휘저었지만 소득이 없었다. 15시간의 밤을 꼬박 지샌 여정. 뱃멀미로 탈진 직전 상태에서 단둥에 도착했다. 압록강과 두만강 물줄기를 따라 단둥과 롱징, 투먼 등에서의 밀무역 현장과 선양, 옌지, 베이징 등 북한 문화재가 팔려 다니는 거래 시장까지, 11일간의 장도에서 확인한 도굴과 밀거래로 훼손된 북한 문화재는 남북 분단의 또 다른 희생물이었다. 역사의 혼과 선조의 얼이 깃든 `우리 문화재'는 개성의 무덤에서, 의주의 사찰에서, 평양의 박물관에서, 그리고 평범한 가정집에서 아무렇게나 파헤쳐져 이국 땅을 헤매고 있었다.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전날 베고 자던 베갯모까지 뜯어 파는 인민들, 조선중앙박물관과 개성박물관 창고에 좋은 골동품이 산적해 있으니 얼마든지 사가라며 외화벌이에 나선 북한 고위관리들…. 중국 현지의 한국 상인들은 중국 골동품 중개 거래 시장의 주도권을 모두 중국 상인들에게 빼앗긴 채 피폐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두려움이나 호기심보다 답답함과 분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언젠가 고향집에 놓인 곰팡이 냄새나는 골동품에 얼굴을 찡그릴 때 우리의 옛 것이 예쁘게 보일 때, 그 때가 철 들 때다라던 아버지의 말씀. 그 옛 것들이 예쁘게 보일 겨를도 없이 안쓰럽고 측은하게만 느껴지는 속앓이는 출장에서 돌아와서도 가실 수가 없었다. 한국 골동품 상인들은 보도를 막았다. 주요 거래가 막히면 북한동포와 불경기로 시름하는 남한 골동상인들의 밥줄이 끊어진다는 논리였다. 왜 `우리들의 문화재'를 한민족끼리 몰래 들여와서 몰래 팔아야 하나. 우리 문화재가 중국을 거쳐 일본, 유럽으로 남몰래 팔려 나가는 것도 속상한데, 넘쳐나는 가짜 골동품 때문에 국제시장에서는 자칫 중국 골동품의 아류로 전락할 처지에 놓였다. 새로운 고민이 시작됐다. 팔려 다니는 북한 문화재의 주요 거점과 경로, 거래 가격과 역사, 거상들에 대한 상세한 취재 내용을 모두 쓰면 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밥줄이 위험해질 텐데. 시리즈 기사가 두 차례 나간 뒤 인사동 상인들로부터 중국 국경 경계가 강화돼 골동품이 단 한 점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전해들었다. 분단으로 인한 한반도의 또 다른 상처. 당장 지금은 아플지라도 우리 역사의 아픔은 면밀히 기록해야 한다. 냉정해져야 한다. 두 달간의 국내 취재, 열흘간의 해외 취재, 한달간의 보도. 지난 3개월간 선배들과의 밀착 취재기간 초기엔 흥분했다. 우리 문화재가 이렇게 버려지고, 훼손되도록 방치해도 되는가. 북한당국이나 우리 정부는 도대체 뭘 하고 있다는 건가. 화가 났다. 그러나 기자는, 객관적 관찰자다. 아직도 배우고 익혀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은 3년차 새내기 `기자'. `기자가 되고 싶다'가 아니라 `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순간. 지난 3년 약간은 무뎌진 그 첫 마음은 신기하게도 지난 석달간 밤잠을 설치며 역사와 민족, 기자의 임무에 대해 고민을 하는 사이 조금씩 되살아난 것 같다. 나의 북한 문화재 밀거래 취재는 안타까움을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