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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9호 2020년 8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전원일기와 쿠팡맨

이지영 중앙일보 문화팀장·본지 논설위원



전원일기와 쿠팡맨



이지영
약학89-93
중앙일보 문화팀장·본지 논설위원



드라마 ‘전원일기’를 가끔씩 본다. TV 리모콘을 돌리다 김혜자·최불암·고두심 등 익숙한 얼굴의 젊은 모습을 보면 반가운 마음에 채널을 고정하게 된다. 그런 시청자들이 꽤 많은 모양인지 요즘 ‘전원일기’를 방송하는 케이블 채널이 여럿이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방송됐던 ‘전원일기’는 한국 방송사에서 전설적인 작품이다. 최장수 드라마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뿐더러 농촌의 인정과 애환을 잔잔히 풀어낸 수작으로 통한다.

그런데 이제 와 다시 본 ‘전원일기’엔 깜짝 놀랄 장면이 많았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무공해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기억과 달랐다. 권위주의적·가부장적 문화에 성차별적 언행이 거침없이 펼쳐졌다. 이부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아이들에게 술 심부름을 시키는 장면은 차라리 별문제 없어 보였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폭력에 너무 관대하다는 점이었다.

1987년 방송됐던 300회 특집 ‘곳간열쇠’편만 해도 그랬다. 집안 살림 주도권을 놓고 시어머니(김혜자)와 큰며느리(고두심)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극 중반 큰아들(김용건)이 갑자기 자기 아내의 뺨을 때렸다. 어머니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게 이유였다.

‘전원일기’에서 가정폭력은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온화하면서도 올곧은 인물의 전형으로 묘사돼온 큰아들의 폭력은 충격이었다. 아니, 이 일을 어떻게 수습하려나, 걱정까지 됐다. 그런데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그날 에피소드에서 그 일은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남편이 아내의 뺨을 때리는 장면이 그저 일상으로 처리된 것이다. 당시의 TV 비평 기사는 어땠는지 옛날 신문을 뒤져봤다. “세대교체의 아픔, 아름다움으로 승화”(중앙일보), “작품성에 충실한 드라마”(경향신문) 등 호평 일색이었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다. 최근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로 시작하는 ‘뽀뽀뽀’ 주제가에 “엄마가 출근할 때 뽀뽀뽀”로 시작하는 2절이 새로 생겼다. 워킹맘이 늘어난 세태를 반영한 것이다. 쿠팡의 배송직원을 부르는 명칭은 지난달 ‘쿠팡맨’에서 ‘쿠친(쿠팡친구)’으로 바뀌었다. 여성도 하는 배송직원이 왜 쿠팡‘맨’이냐는 여론 때문이다.

가정폭력이 아무렇지도 않은 시대부터 쿠팡맨이 불편한 시대까지 30여 년을 우린 한달음에 달려왔다. 인권 감수성, 성인지 감수성의 수준이 크게 달라졌다. 그 변화에서 뒤처지는 순간 사고가 터진다. 서울시장·부산시장이 동시에 공석이 된 현실도 어쩌면 그 결과가 아닐까. ‘전원일기’ 시대를 거쳐간 모두가 정신 바짝 차려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