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호 2005년 5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19년 만에 다시 찾은 독도
하나.
지난 4월 4일 독도에 다녀왔다. 아니 정확히 말해 독도 앞바다까지 다녀왔다.
울릉도에서 독도를 오가는 삼봉호가 독도 접안을 시도했지만 독도는 쉽게 뭍사람들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일본 고위 관리들의 망언이 있을 때마다 육지 사람들은 독도를 지켜야 한다, 독도를 사랑하자고 외친다. 평소에 잘 하라는 뜻일까?
우리 국토의 막내, 독도는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나 1년에 여객선이 독도에 접안 할 수 있는 날보다 못하는 날이 더 많으니 그리 실망할 일도 아니다.
사실 독도 접안이 1년에 며칠이나 가능한지에 대해 공식 통계는 없다. 어떤 언론사는 1년에 40일 정도가 가능하다고 했고 또 다른 언론사는 80일 정도가 가능하다고 보도했다.
해양경찰청은 1년에 1백40일 정도 여객선이 독도로 항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3월 24일 독도에 일반인의 입도가 허용된 이후 4월 4일까지 관광객을 실은 배가 독도에 닿은 것은 단 두 차례. 그만큼 독도 앞바다에서 동도와 서도의 장관만 조망하고 뱃머리를 돌려야만 했던 관광이 더 많다는 얘기다. 둘. 한국의 대표 시인 1백여 명이 지난 4월 4일 독도 앞바다에서 독도사랑 예술제를 펼쳤다. 동해 용왕이 시인들의 시심을 시샘해서일까? 4월 3일 포항에서 시인들을 태우고 울릉도로 향하던 여객선은 4미터에 이르는 높은 파도를 끝내 뚫지 못하고 항해 3시간 만에 포항으로 회항해야 했다. 이튿날 오전 다시 장도에 나선 시인들은 울릉도를 거쳐 독도까지 모두 7시간 뱃길을 헤쳐 왔다. 끝내 열리지 않은 독도의 문턱에서 시인들은 선상 예술제를 열었다. 고 은 시인은 미리 준비한 詩 대신 즉흥시를 낭송했다. 네 이름을 부르러 왔다. 네 이름을 불러 세상 가득히 너의 천년을 전하러 왔다. 시인은 독도를 보면서 용솟음치는 문학적 상상력을 그대로 손바닥만한 메모지에 토해냈다. 독도사랑 시낭송 예술제는 그렇게 30분만에 약식으로 치러졌다. 시인들의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매기들만이 시인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셋. 19년 전, 1986년 4월 대학교 4학년 때 정치학과는 독도로 졸업여행을 다녀왔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데 남들처럼 제주도 같은 관광지로 졸업여행을 갈 수 없다는 명분에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5공화국 당시 일반인들의 독도 입도는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입법부와 행정부에 있는 몇몇 선배들의 도움을 받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독도경비대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해양경찰청 소속 경비함정이 한 달에 두 번 정도 독도에 들어간다. 화산섬 독도에선 먹을거리를 재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묵호항에서 李洪九선생님을 지도 교수로 모시고 독도로 향하는 해경 경비함정에 올랐다. 다행히 잔인한 달 4월의 동해 바다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경비정에서 목선으로 옮겨 탄 우리는 무사히 독도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는 미리 준비한 기념품을 독도경비대원들에게 전달하고 기념촬영을 한 뒤 다시 경비함정을 타고 울릉도로 돌아왔다. 넷. 1980년대 초에도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겼다. 정광태 씨가 그의 유일한 히트 곡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 때가 1983년. 5공화국 당시 우리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정책을 어떻게 펼쳤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독도는 우리 땅'은 방송에서 상당기간 들을 수 없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독도문제는 아직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독도를 국제 분쟁지역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정부가 독도와 관련해 `조용한 외교'를 벌인 것은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10년 불황에 끙끙거리던 일본이 이제 좀 나아졌는지 또 다시 군국주의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는 독도와 관련해 지금까지의 `조용한 외교'를 재고하겠다고 밝혔다. 독도는 역사적․실효적으로 우리 땅이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다지는 차원에서라도 독도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독도에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시설 보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 땅 독도를 눈앞에 두고 흙 한줌 만져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는 길보다 안타까운 여정이 있을 수 있을까?
해양경찰청은 1년에 1백40일 정도 여객선이 독도로 항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난 3월 24일 독도에 일반인의 입도가 허용된 이후 4월 4일까지 관광객을 실은 배가 독도에 닿은 것은 단 두 차례. 그만큼 독도 앞바다에서 동도와 서도의 장관만 조망하고 뱃머리를 돌려야만 했던 관광이 더 많다는 얘기다. 둘. 한국의 대표 시인 1백여 명이 지난 4월 4일 독도 앞바다에서 독도사랑 예술제를 펼쳤다. 동해 용왕이 시인들의 시심을 시샘해서일까? 4월 3일 포항에서 시인들을 태우고 울릉도로 향하던 여객선은 4미터에 이르는 높은 파도를 끝내 뚫지 못하고 항해 3시간 만에 포항으로 회항해야 했다. 이튿날 오전 다시 장도에 나선 시인들은 울릉도를 거쳐 독도까지 모두 7시간 뱃길을 헤쳐 왔다. 끝내 열리지 않은 독도의 문턱에서 시인들은 선상 예술제를 열었다. 고 은 시인은 미리 준비한 詩 대신 즉흥시를 낭송했다. 네 이름을 부르러 왔다. 네 이름을 불러 세상 가득히 너의 천년을 전하러 왔다. 시인은 독도를 보면서 용솟음치는 문학적 상상력을 그대로 손바닥만한 메모지에 토해냈다. 독도사랑 시낭송 예술제는 그렇게 30분만에 약식으로 치러졌다. 시인들의 안타깝고 아쉬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갈매기들만이 시인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셋. 19년 전, 1986년 4월 대학교 4학년 때 정치학과는 독도로 졸업여행을 다녀왔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데 남들처럼 제주도 같은 관광지로 졸업여행을 갈 수 없다는 명분에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5공화국 당시 일반인들의 독도 입도는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입법부와 행정부에 있는 몇몇 선배들의 도움을 받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독도경비대원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해양경찰청 소속 경비함정이 한 달에 두 번 정도 독도에 들어간다. 화산섬 독도에선 먹을거리를 재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묵호항에서 李洪九선생님을 지도 교수로 모시고 독도로 향하는 해경 경비함정에 올랐다. 다행히 잔인한 달 4월의 동해 바다는 잔잔한 호수 같았다. 경비정에서 목선으로 옮겨 탄 우리는 무사히 독도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는 미리 준비한 기념품을 독도경비대원들에게 전달하고 기념촬영을 한 뒤 다시 경비함정을 타고 울릉도로 돌아왔다. 넷. 1980년대 초에도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겼다. 정광태 씨가 그의 유일한 히트 곡 `독도는 우리 땅'을 부른 때가 1983년. 5공화국 당시 우리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정책을 어떻게 펼쳤는지 잘 알 수 없지만 `독도는 우리 땅'은 방송에서 상당기간 들을 수 없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독도문제는 아직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예나 지금이나 독도를 국제 분쟁지역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 정부가 독도와 관련해 `조용한 외교'를 벌인 것은 상당부분 이해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10년 불황에 끙끙거리던 일본이 이제 좀 나아졌는지 또 다시 군국주의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정부는 독도와 관련해 지금까지의 `조용한 외교'를 재고하겠다고 밝혔다. 독도는 역사적․실효적으로 우리 땅이다. 독도에 대한 실효적 지배를 다지는 차원에서라도 독도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독도에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최소한의 시설 보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 땅 독도를 눈앞에 두고 흙 한줌 만져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오는 길보다 안타까운 여정이 있을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