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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7호 2020년 6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화제의 동문 의원: 제21대 국회의원 박 진·김민석·서범수·장철민

서울권 통합당 4선 박진 / 18년 만 복귀 김민석/ 형제 국회의원 서범수/ 비수도권 유일 30대 장철민


화제의 동문 의원



파출소서 꺼내준 이수성 교수 눈에 선해

박 진(법학74-78) 미래통합당 국회의원




통합당 2명뿐인 서울권 4선 의원

“한일관계 회복에 힘 쏟겠다


박 진(법학74-78) 동문이 8년간 원외에 있다, 이번 21대 총선에서 현역 의원인 더불어민주당 전현희(치의학84-90) 의원을 꺾고 돌아왔다. 그가 3선을 역임한 고향 종로가 아닌 강남(을)에서다. 권영세 의원과 함께 미래통합당엔 두 명뿐인 서울권 4선 중진이다.

박 동문은 20세에 외무고시에 합격해 중앙청에서 사무관으로 첫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해군 장교 복무를 마치고 26세에는 유학길에 올라 미국, 영국, 일본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영국에서 대학교수로 재직하던 36세에 당시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 비서관으로 발탁돼 5년간 대통령 공보 비서관, 정무 비서관으로 활동했다. 46세에 고향인 정치 1번지 종로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내리 3선에 성공했다. 18대 국회에서는 통일외교안보통상위원장으로 활동하는 등 외교 전문가로 당내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18대 국회를 마무리하며 정치에 실망과 한계를 느껴 19대 총선에 스스로 불출마를 선언했다. 권력의 세계를 떠나 바깥에서 국민의 눈으로 정치를 바라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박 진 동문은 본지와 서면 인터뷰에서 “결과적으로 지난 8년간 넓은 세상에서 정신적으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대학 강단에서 석좌교수로 청년들을 가르치며 그들과 젊은 세대의 고민을 이야기하고, 아시아의 미래를 연구하는 정책 싱크탱크를 만들어 국내외에서 4차 산업혁명과 미래먹거리 창출에 대해 토론하고, 미국 유럽 아시아를 방문하며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 젊은이들과 스타트업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대한민국 정치 혁신과 국익 창출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왔습니다. 그동안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모든 것을 새로운 정치를 위해 쏟겠습니다.”

박 진 동문은 서울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야당 중진의원으로 이번 21대 국회에서 역할이 크다. 미래통합당이 당명 그대로 정말 국민을 통합하고 미래를 보여주는 당이 될 수 있을까 .

박 동문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미래통합당은 아날로그 DNA를 디지털 DNA로 혁신적으로 바꾸는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통합당은 낡은 보수, 꼰대 보수 정당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기 위해 2030 젊은 디지털 세대의 언어와 사고방식을 이해하고 이들과 적극 소통하며, 이를 정책 활동에 반영하는 미래지향적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바꿔야 삽니다.”
그러면서 현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 부동산규제, 세금폭탄, 외교고립, 남북관계 실패 등 실책을 바로잡고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박 동문은 “특히 외교 분야에서는 표류하는 한미동맹을 정상궤도에 올려놓고 중국에 대해서는 의연한 자주외교를 하고, 악화된 한일관계를 회복하는 데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

박 동문은 어니언스의 편지가 유행하던 시절 74학번으로 1학년 교양 과정을 태릉에서 보냈고, 2학년부터 신림동 관악캠퍼스로 다녔다. 관악 1세대인 셈이다. 1학년 때는 서울 공대 앞의 ‘쌍승당구장’, ‘대성식당’의 단골이었고 2학년 때는 관악구청 앞 ‘한잔집’에서 두부김치에 막걸리를 마시면서 사회계열 친구들과 시국을 논하곤 했다.

긴급조치 9호 반대 데모를 하다가 관악파출소에 붙잡혀 있을 때, 당시 형법을 가르쳤던 이수성 교수가 와서 구해준 것은 잊을 수 없는 사건이다.

그는 “교수님이 담당 경찰에게 허리 굽혀 깍듯이 인사하며 우리를 빼 주시고 저녁에 짜장면까지 사주셨다”며 “용기를 잃지 말라며 격려해 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고 했다.

이수성 교수 외에 국제법을 가르친 이한기 교수, 주례를 서주신 배재식 교수, 대학원 조교로 모신 박충현 교수, 보험 해상법을 가르친 송상현 교수를 잊을 수 없는 은사로 꼽았다.

박 동문은 조윤희(기악75-79) 동문과 캠퍼스 커플이다. 동창회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옥스퍼드대 한국동문회 회장도 맡았다. 박 동문은 총동창회에 대해 조언을 부탁하자 “산업자원부 장관과 평창 동계올림픽 조직위원장 등을 지내신 이희범 신임 회장님은 동창회장으로 최적임자라 생각한다”며 “이번에 새롭게 진용을 짜고 새로운 각오로 새 출발 하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 동창회가 일취월장 꾸준히 발전하기를 기원한다”고 전했다.

박 동문은 체력 관리를 위해 등산을 한다. 주말에 대모산 자락을 오르며 지역 주민과 소통하고 있다.





“약자의 눈으로 세상 바꾸고 싶다”


김민석(사회82-89)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초선 같은 3선…18년 만에 복귀

아크로폴리스, 김채윤 교수 떠올라


“약자의 눈으로, 미래의 눈으로, 국민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사람 중심의 포용 사회를 열어 가겠습니다.”

386세대의 기수 김민석(사회82-89) 동문이 국회의원 임기를 시작하며 밝힌 포부다. 김 동문은 2002년 서울시장 낙선 후 18년 만에 정치 고향 영등포을에서 당선돼 정계에 복귀했다.

1992년 14대 총선에 만 28살의 나이로 제1야당 공천을 받아, 민주자유당 나웅배 후보에게 불과 260표 차로 낙선하면서 화려한 신고식을 치를 때만 하더라도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15, 16대 국회의원에 연이어 당선되며 정치권과 언론에서 차세대 대선 주자로 손꼽는 데 이견이 없었다. 2000년에는 세계경제포럼이 선정한 ‘미래를 이끌어갈 세계 지도자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김 동문은 여세를 몰아 2002년 지방선거에 출마해 서울시장에 도전했지만,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에 패했다. 그해 16대 대선을 기점으로 그의 정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후보 단일화를 목표로 새천년민주당을 나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 캠프로 들어갔다. 정권 재창출을 위한 정치공학적 선택이었고, 노무현 후보의 당선으로 실제 정권 재창출을 이뤄 당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좋지 않은 이미지가 옥의 티처럼 생겼다. 이후 2004년 17대 총선에 출마해 국회 재입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혼이라는 개인적인 아픔도 겪었다.

김 동문은 본지와 서면 인터뷰에서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묵묵히 견디는 인내심이 좀 생겼고 하늘과 국민이 가장 두렵고 감사하다는 것을 배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지난날을 복기해 보면 현실정치를 이뤄가는 데 정치공학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더 근본이 되고 중요한 것은, 국민의 마음이란 깨달음이 큽니다. 이번 선거 때 코로나가 극심했던 상황에서 출퇴근 인사를 하면서 울컥할 때가 많았습니다. ‘얼마나 힘들까’, ‘저분들의 일상은 어땠을까’,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잖아요. 무엇을 볼 때 그 전보다 더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 지난 세월이 준 가르침입니다.”

18년 만의 정계 복귀지만 여전히 김 동문은 초선의 이미지가 강하다. 훈훈한 인상에 청년 시절 일찍 정계에 입문한 탓일까. 선거 당시 구호도 ‘돌아온 정치 신인’이었다. 김 동문은 “실제 마음가짐도 초선 의원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정치에 대한 생각이 단순해졌습니다. ‘정치적이다’란 수사가 뭔가 순수하지 않다는 뉘앙스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냥 보통 사람의 눈으로 선하고 진보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판단을 하는 거죠. 20대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마음으로요. 국민에게 과거 정치적 경험이나 경륜은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새로운 걸 바라고 거기에 맞추는 게 옳다고 생각합니다.”

김 동문은 대학 4학년 때인 1985년 모교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전국대학 총학생회 연합체인 ‘전학련’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1980년대 초 학생 운동을 주도했다. 1985년 서울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 및 삼민투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3년간 복역하기도 했다.

학창시절 기억에 남는 장소로 그는 “도서관 앞 아크로폴리스와 자하연이 생각난다”고 했다. 고 김채윤 교수님의 소탈한 모습도 떠오른다고 했다. 코로나19 사태 등이 겹쳐 오랜 공백상태에 있는 총학생회를 향해 “학생사회 내부의 건강한 토론문화와 민주적 질서를 세우고 공동체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유지하길 바란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김민석 동문이 18년의 시간을 버티며 다시 국회로 돌아온 이유는 뭘까.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걸까. 마지막으로 물었다.

“동년배들이 대부분 그렇지만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있습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고, 약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습니다. 지금 코로나19 이후 문명이 완전히 바뀌는 대전환의 시기고 사람들의 삶이 어려워지는 게 보입니다. 이럴 때 정치가 먼저 방향을 잡아서 국민이 불안하지 않게 도와야 합니다. 크게, 멀리 보고 포용 국가의 비전과 모델을 만드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고 싶습니다.”

김 동문의 이메일 아이디는 newmskim2030이다. 정치를 시작할 때, 2030년쯤이면 우리나라가 통일된 선진국이 된 것을 보며 은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지은 것이다. 2030년에서 10년을 남겨두고 복귀한 그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기대된다.


김남주 기자





“국회의원 3선까지만 해도 충분”

서범수(농경제82-86) 미래통합당 국회의원




서병수 부산 진구갑 의원 동생

해수부 사무관서 경찰로 전직 눈길


지난 4·15 총선 때 형제가 나란히 국회 입성을 확정지어 화제가 된 당선인이 있다. 서범수(농경제82-86) 동문과 그의 11살 터울 형인 서병수 전 부산시장이 그 주인공. 16·17·18·19대에 이어 21대 국회에서 5선 의원이 된 형과 달리 서범수 동문은 2019년 정계에 뛰어든 초선 국회의원이다. 해양수산부 사무관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해 3년 만에 경찰로 전직, 25년 동안 봉직한 이력으로도 눈길을 끈다. 울산 울주군에서 당선된 서범수 동문을 지난 6월 1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같은 회기에 형제 국회의원이 탄생한 건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집안으로 보면 정말 큰 영광이지만, 그만큼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돼요. 둘 중 한 명이라도 잘못하면 함께 비판을 받게 될 테니 더 긴장하고 잘해야 된다고 형님과 얘기 나누기도 했죠. 뽑아주신 국민들의 간절한 바람을 무겁게 받아들여 정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같은 당에 같은 집안의 국회의원. 언뜻 생각하면 정치적 지향점도 비슷할 것 같지만, 서범수 동문은 ‘서범수 의원’으로서의 자기 관점이 확실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헌법기관인 만큼 경륜이나 서열에 얽매이지 않고 “할 말은 하겠다”는 각오를 내비쳤다. 일례로 지난 총선 때 당을 나가 무소속으로 당선된 의원들의 복당 문제를 들 수 있다. 서병수 의원을 포함한 중진들은 대체로 가능한 빨리 복당시켜 통합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서 동문은 “당의 결정에 따르지 않고 탈당을 강행했으면 어느 정도 시간을 두는 게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서 동문은 또 “국민을 보고 정치하도록 제도를 바꾸면 한국 정치의 문제점 중 상당 부분이 해결될 것”이라며 소신 발언을 쏟아냈다.

“많은 국회의원과 국회의원 후보들이 공천을 받기 위해 권력자의 눈치를 봅니다. 선거 때만 반짝 국민에게 다가갈 뿐이에요. 때문에 저는 후보로 출마하는 과정부터 당선 이후 의원으로서 봉직하는 동안에도 국민의 영향력이 지속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국민참여형 공천제’와 ‘국회의원 중간평가제 및 국민소환제’를 추진하려고 해요. 선거 전부터 국민이 후보를 선택하고, 임기가 남았어도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을 경우 그 권한을 박탈할 수 있다면, 국민을 바라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서 동문은 또 ‘국회의원 3선 연임 제한법’을 주장하기도 했다. 서병수 의원이 이미 5선인데 그런 형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4년씩 3번, 도합 12년이면 정치적 신념을 펼쳐 보이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것. 지방자치단체장 3선 연임을 제한하듯 국회에도 그런 규정을 둔다면, 자연스럽게 세대교체도 되고 국회의원의 직업화도 막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당론과는 거리가 있지만, 보수정당인 미래통합당 의원이 진보정당인 정의당 쪽에서 내세우는 법안에 공감을 표명한 셈이다.

“저는 소위 ‘똥파리’라고 불렸던 서울대 82학번 세대입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저도 고교 동문이나 과 선배의 권유로 각종 사회과학 독서 연구회에 활발히 참석했었죠. 보수적인 집안의 영향으로 운동에 적극 동참하진 못했지만, ‘우상과 이성’, ‘해방전후사의 인식’ 등 소위 이념 서적을 탐독하기도 했어요. 당시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권위주의의 타파는 많은 국민이 공유하는 가치였고, 저 역시 공감하는 부분이었죠. 그 시절의 영향으로 전반적으론 보수 성향이면서도 구체적인 안건에 관해선 비교적 열린 시각과 유연성을 갖게 됐습니다.”

행정고시 합격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한 그가 경찰로 전직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경찰공무원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동경심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서 동문은 현장에 대한 갈증을 전직의 또 다른 이유로 꼽았다.

“책상 앞에서 펜대 굴리는 것보다 국민 속으로 들어가 함께 호흡하며 일하고 싶었습니다. ‘우문현답’ 즉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는 소신으로 근무했어요. 2015년 울산지방경찰청장으로 근무할 당시 전국적으로 4,621명이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을 만큼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많았는데, 경찰 입장에선 살인사건은 위중하게 여기는 반면 교통 사망사고는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국민의 입장에선 살인사건이나 교통 사망사고나 소중한 생명을 잃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에 저는 교통 시설물을 보강하고, 교육 및 홍보 활동을 강화하며, 경찰 역량을 총동원해 사고 많은 지점을 24시간 단속하는 등 사고 예방에 심혈을 기울였어요. 그 결과 울산이 지난해 교통 사망사고 감소율 전국 1위를 차지했죠. 국회의원으로서 새롭게 출발하는 지금 ‘우문현답’의 정신을 되새기겠습니다.”

나경태 기자





“4년치 일 1년 안에 해내겠다”

장철민(정치02-06)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홍영표 전 원내대표 수석보좌관 거쳐

비수도권 유일 30대·대전 최연소 당선



“어리바리하면 안 되죠. 4년 금방입니다.”

‘초선답지 않다’는 소문 그대로였다. 만 36세에 대전 동구에서 첫 금배지를 단 장철민(정치02-06) 더불어민주당 의원. 비수도권 유일의 30대 국회의원이자 학부 출신 21대 동문 의원 중 최연소인 그의 이력은 단순하되 깊다. 정치를 전공하고 7년 반 동안 국회 보좌진으로 일하며 오로지 정치에서 뼈가 굵었다. 요즘 드문 여의도 엘리트 코스다. “4년치 일을 1년 안에 해내겠다”고 말하는 자신감의 근거가 여기 있다.

5월 28일 개원 준비가 한창인 국회에서 그를 만났다. 백팩을 메고 마주치는 사람들과 허물없이 인사하는 모습이 쭉 이곳에서 일한 이다웠다. “어려서부터 ‘역사의 현장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전공 선택에 영향을 줬죠. 학생운동이 약해진 세대다 보니 저도 재학시절 학생정치는 하지 않고 학회와 사회대 ‘한길반(사회복지학과 과반)’ 활동만 했습니다. 그러다 정치를 직업 삼겠다고 마음먹은 후엔 국회에 갈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다녔어요.”

선거캠프 자원봉사자, 대학생 명예보좌관 등을 거쳐 행정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밟던 중 보좌진 공채에 합격해 꿈을 이뤘다. 19대 홍영표 의원실에 7급 비서로 합류, ‘일 잘한다’ 소리 들으며 비서관과 보좌관으로, 홍 의원이 민주당 원내대표가 되자 2급 정책조정실장까지 고속 승진했다. 각종 국정감사와 국정조사, 청문회에서 번뜩이는 순간을 만들어낸 공신이다. 184cm의 훤칠한 키, 워커홀릭인 면모에 드라마 ‘보좌관’ 주연 이정재의 실사판으로도 불렸다.

출마를 결심한 것은 “결정하고 책임지는 선수로 뛰고 싶어서”였다. 청년 정치에 대한 목마름도 컸다. 현실 정치의 복판에서 일찌감치 정무 감각을 몸에 익힌 자신이 앞장서 보여줄 것이 있다고 믿었다. “정치에서 스펙 쌓기가 취준생 스펙 쌓기만큼 어렵습니다(웃음). 당에서 보좌진을 했더라도 외부에서 스펙을 만들어 와야 정치에 나설 수 있는 상황이죠. 저처럼 당에서 성장하고, 훈련받은 사람이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실패해도 의미 있을 것 같았어요. ”

대전에서 나고 자라 서대전고를 졸업한 그는 보수세가 강한 동구로 향해 낙후된 원도심에 대전의료원 설립, 혁신도시 유치와 공공기관 이전 등을 공약했다. 험지라고 했지만 참모로 몇 번의 선거를 겪어봐서인지 흔들리지 않았다. 선거운동 할 때 얼굴이 하도 밝아 당에서 “체질 같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다. 정부 정책결정 메커니즘을 아는 ‘준비된 신인’임을 어필했고 홍영표 의원이 “대한민국 국가예산 500조를 다뤄본 유일한 30대”라며 힘을 보탰다. ‘대전에서 인물 나왔다’며 승리를 안겨준 주민들에게 맏아들처럼, 친구처럼 소통하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첫 출마에 으레 겪는 배우자의 반대도 없었다. 동갑내기 동기 이시은(정치02-08) 동문과 캠퍼스 커플로 결혼해 외동딸을 뒀다. 이 동문도 정치 공부를 계속해 최근 행정대학원에서 정책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스물 두 살부터 9년 연애하고 결혼했으니 ‘장철민’에 대한 이해도가 높죠. 그만큼 직설적이기도 합니다. 선거 끝나자마자 ‘정치 똑바로 안 하면 다음에 선거운동 안 해준다’고 말하던걸요.”

그는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지방청년의 대표성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잘 안다”고 했다. 마음 속 1호 법안으로 청년들이 지역에서 평생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는 ‘지역청년지원법’을 구상 중이다. 당에서는 청년 정치의 씨앗을 심는 책무를 맡을 듯하다. “처음부터 빨리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국회에 온 건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더 나아지려면 입법부가 나아져야 하고, 그러려면 정당이 발전해야 하는데, 평생을 정당 발전에 바쳐도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죠. 사람을 키우는 게 정당 발전에 중요하기에 4년뿐만 아니라 평생 해야 할 일이란 생각을 합니다. 마침 당 사정이 좋은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입니다.”

첫 당선의 기쁨도 잠시, 차분하게 초심을 되새긴다. “처음 국회에서 일하며 가장 즐거웠던 게 있어요. 정치란 게 기존 사회질서와 거꾸로구나, 모두 센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셀 때 정치하는 사람만은 반대로 할 수 있구나. 장관에게 당당히 지적하고 동네 범부의 말은 경청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라 생각을 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정치인으로 빛나는 곳을 더 빛내는 게 아닌 취약점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깊어집니다. 사회의 균형을 맞춰가고 싶습니다.”

장 동문은 지난 6월 9일 민주당 전당대회준비위원회 대변인으로 임명됐다. 정치학과 1년 후배인 황두영 동문이 보좌관으로 그와 함께 뛴다. 장 동문의 활약으로 원내에는 70년대부터 2000년대 학번까지 정치학과 동문이 고루 포진하게 됐다. 홍영표 전 원내대표 의원실에서 장 동문을 비롯해 비서실장을 지낸 오기형(공법86-91) 동문이 서울 도봉을에서 당선됐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