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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호 2005년 5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복학생의 어려움 교수님 배려로 극복

입학 6일후 전쟁 일어나 7년만에 졸업

필자는 55년 전인 1950년 6월 19일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그 해의 대학 입학생들은 미국식 가을 신학기에서 종전의 봄 신학기로 학제가 환원됨에 따라 과도적으로 5월에 고교를 졸업하고 6월에 대학에 진학했다.  그런데 입학한지 6일만인 6월 25일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다음날 6월 26일 월요일 아침, 문리대 캠퍼스 북녘에 있는 운동장에서 역사학자인 孫晉泰학장의 훈시를 들으며 전교생이 조회를 가졌다. 그 날 오후 정부가 방송을 통해 인민군에게 잠시 의정부를 빼앗겼으나 국군이 다시 격퇴시키고 있으니 국민은 안심하라는 것이었다. 정부를 믿고 그 날은 설마 하고 그렇게 보내고 다음날 6월 27일 포성이 미아리고개 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정이 넘어 점차 포성은 멈추고 날이 새어 거리에 나가 보니 인공기가 휘날리며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6월 28일 아침 수도 서울은 이렇게 사흘만에 공산 치하에 어이없이 함몰되고 말았던 것이다.  해방 60년 동안 우리 50년도 대학 입학생만큼 불우했던 적은 없을 것이다. 많은 학생이 국군 혹은 의용군으로 가야했다. 우리가 바로 6․25세대인 것이다. 3년만에 휴전이 되고 서울이 수복됨에 따라 우리는 다시 동숭동 캠퍼스에 돌아왔다. 대부분의 동료들이 아르바이트로 입학한지 6~7년 혹은 그 이상 긴 시간을 보내며 어렵사리 학업을 마쳤다. 그러다 보니 전쟁 중 항도 부산에서 51년, 52년, 53년에 들어온 우리 입학 후배들이 졸업은 선배가 되는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허다하게 발생했다. 우리 복학생들은 수업 시간을 채우기 힘들었기에 시험 때마다 시험지 상단에 `83년 입학'이라고 크게 써넣고 교수님들의 동정을 호소했다. 교수님들도 복학생들을 어여삐 여겨 잘 보듬어 주셨다. 우리가 입학한 1950년은 단기 4283년으로서 지금의 83학번이 되는 셈이었다.  그 시절 겨울철에 강의실에 난방이 된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그러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권위 있고 진지한 교수님들의 강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李用熙교수의 국제정치학연습 시간에 첫 강의를 빼먹어 세미나 주제의 배당을 못 받고 수강신청이 거부되는 난감함도 겪었으며, 柳洪烈교수의 한국근세사 시험 때는 한 학생의 부정행위로 인해 시험 자체가 취소돼 다시 치러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또 朴浚圭교수의 국제 기구 시험 때는 답안지를 영문으로 쓰라고 해 영작문 하느라 진땀을 뺀 일이 있었으며, 韓泰淵교수의 헌법학 시험 때는 국가 권력의 잉여가치를 논하라는, 개념조차 모호한 문제를 받고 횡설수설 작문으로 일관했던 일들이 생각난다. 梁柱東교수의 강의시간에는 청강생까지 포함해 교실은 물론 복도까지 초만원을 이루는 대성황이었다.  그 시절 문리대는 이 나라의 학문의 전당이었고 지성의 상징이었다. 미국 듀크대학의 코헤인 총장이 언급했듯이 대학은 교수진이 우수하고 시설이 뛰어나야 함은 물론이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진지하면서도 즐거움에 넘치는 진리탐구의 열정과 분위기가 캠퍼스에 넘쳐나야 하는 것이다. 동숭동 문리대에는 이런 맥락의 자랑스런 학풍이 깃들여 있었다고 확신한다. 문리대 본관 정면에 붙었던 `대학의 대학'이란 플래카드도 그 시절 우리들의 오만한 지성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