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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호 2019년 12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지켜주고 싶다’에 담긴 시선

최유리 작가 패션 크리에이터

녹두거리에서





최유리
사회교육96-00
작가·패션 크리에이터


“제가 작가님을 만나러 온 이유는요… 작가님을 지켜드리고 싶어서예요.” 어느 날 오후, 글쓰기 수업 장기 수강생이신 K님이 뜬금없이 고백하셨다. “어… 제가 왜 그렇게 보였을까요?” “내향적인 작가님이 유튜브 하시는 걸 보니까… 이상하게 지켜드리고 싶더라구요.” 당황의 실체를 채 파악하기 전, 다음 고백이 이어졌다. “근데… 작가님은 서울대 출신이셨어요.”


뭔가 이상했다. 분명 호감의 표현인데 기분이 마냥 좋은 건 아니라니. 뭐라고 감사 표현을 했어야 했지만 난 아무 말도 못했다. 내 입장을 모르는 상태에서 답하는 건 내키지 않았다.


‘지켜주고 싶다’는 말의 전제는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외향성이 요구되는 일을 내향인이 할 때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다.’ ‘내향성’에는 감수성, 예민함, 통찰력, 관찰력 같은 다양한 속성이 존재한다. K님의 말씀에선 내향성이 약함 혹은 의존성이란 뜻으로 쓰였다. 어떤 대상에서 비본질적인 속성을 택하고, 그 속성으로 대상을 이해하는 관점. 그건 편견이다. 내 불편함은 편견 때문이었다.


‘외향성이 요구되는 일을 내향인이 할 때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다.’ 이 문장을 이렇게 비틀어 보았다. ‘내향성이 요구되는 일을 외향인이 할 때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하다.’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위해 외향인이 혼자 시간을 가져야 할 때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할까? 물론 아니다. 마찬가지로 내향인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알리기 위한 일을 하는 건 타인의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 아닐 것이다. ‘지켜주고 싶다’는 말엔 호감과 편견이 공존했기에 나는 어떻게 답해야 할지 몰랐다.


‘작가님은 서울대 출신이셨어요.’ 두 번째 고백에도 호감과 편견이 섞여 있었다. 이 말에 깔린 전제는 이런 거다. ‘서울대 출신은 내면이 단단하다’ 물론 우리 학교 출신 중엔 오뚝이 같은 회복탄력성을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반면 정작 자기 마음 보살피는 법은 어디서도 못 배운 나약한 영혼도 있다. 난 견디기 힘들 만큼 괴로운 시기를 지나와서 알고 있다. 학교 이름과 내면의 단단함은 별개라는 걸.


한 명의 인간을 특정 카테고리로 바라보는 시선. ‘다 안다’의 시선은 ‘모른다’의 시선이기도 하다. 그 시선엔 1,000명 이상 혹은 한 명의 인간을 면밀히 관찰하여 데이터를 수집한 후 분석, 종합하는 수고를 건너뛰려는 마음이 있다. 내가 편견을 못 견디는 건 편견 이면의 단순한 사고 때문이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사실 난 ‘지켜주고 싶은 사람’으로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전투의지가 없었다. 덕분에 말 한마디 못하고 당할 때가 많았다. 과거와 달리 지금의 난 그럴 때면 반드시 글을 쓴다. 이때 분노 배설은 피한다. 내 분노로 가장 많이 다치는 사람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를 분노케 한 상대의 사고 프레임을 파악한다. 물론 내 글쓰기는 뒷북이 맞다. 그러나 글로 잘 정리된 생각은 언젠가 나를 지키는 방패가 됨과 동시에 덤덤히 상대방의 궤변을 무력화시키는 창이 된다. 글쓰기는 나의 약한 면을 알게 해주었고, 나를 지키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글쓰기는 최고로 즐거운 멘탈 관리법이다.


‘작가님은 서울대 출신이셨어요’ 이 말은 글쓰기로 내면을 단련시키는 습관을 서울대인의 능력으로 오해한 결과이다. 내면을 관리하는 능력. 그건 특정 학교 출신자에게만 존재하는 능력이 아니다. 이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누구나 글을 쓰며 자신을 비추어 보면 단단한 사람이 됨을 나는 믿는다. 나는 ‘지켜주고 싶을 만큼 약한 사람’도 ‘서울대 출신이라 강한 사람’도 아니었다. ‘지켜주고 싶다’는 K님의 따뜻한 고백에 난 이렇게 답해 드렸다.


“K님, 고맙습니다. 단단한 내면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동행해주셔서요!”




*최 동문은 모교 사회교육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과정을 밟던 중 작가와 패션 크리에이터로 방향을 틀었다. 이후 ‘패션 힐러’를 자처하며 저서 ‘샤넬백을 버린 날,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와 강연 등을 통해 ‘정체성을 입으면 행복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패션 컨설팅을 신청할 수 있는 최유리 동문 홈페이지 https://www.yuri-cho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