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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9호 2019년 10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아프고 난 뒤 보이는 세상

홍지영 본지 논설위원



홍지영
불문89-93
SBS 정책문화팀 선임기자
본지 논설위원
관언회 여기자회 회장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면서 드디어 내 인생의 황금기가 열리나 했다. 입시 끝나니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후배들 말을 들으며 행복했던 어느 날 불청객이 찾아왔다. “초기라 다행”이라는 위로의 말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술 날짜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글자 그대로 ‘멘붕’.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내가 뭘 잘못했기에’ 하면서 밤마다 울었다.


길고 무서웠던 두어 달 뒤 수술이 끝나자, 엄청난 고통이 찾아왔다. 이런 고통이 오래가면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들면서 신병을 비관해 세상을 버리는 심정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의료진 말대로 회복은 ‘드라마틱’했고 ‘이제는 좋아질 일만 남았다.’ 생각하니 행복했다. 재활 치료 등이 남아 있어 길게 휴가를 냈다.


그때부터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92년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긴 휴식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먼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많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환우 카페에 가입한 뒤에는 온갖 사정들이 보였다. 우리 의료 제도의 좋은 점과 나쁜 점도 곳곳에서 보였다. 젊은 나이에 환자가 돼서 몸과 마음이 힘든 사람들, 일하면서 병과 싸우는 많은 직장 여성들 사연에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남편과 아이가 일과 학업 때문에 외국에 있어 어쩔 수 없이 요양지로 선택한 그곳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디젤 자동차와 교통체증, 미세먼지가 없어 공기는 맑았고, 젊은이들도 활기차 보였다. 일자리 부족에 시달리는 우리와 달리 그곳 젊은이들은 취업 걱정이 덜한 듯 보였고, 밝고 생기가 넘쳐나는 듯했다.


재활치료를 위해 다니는 요가 학원에서는 중년층의 생활을 볼 수 있었다. 안정적인 연금제도로 여유가 있었다. 생활에 지친 사람들보다는 제2의 인생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프랑스어를 공부하러 다닌 프랑스문화원도 비슷한 분위기였다. 계속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아프고 나서 시간적 여유를 갖고 그것도 외국에서 요양을 하면서 다시 돌아보게 된 세상은 다양하고 새로웠다. 청년과 노인들이 큰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세상, 아픈 사람들이 더 이상 곤경에 처하지 않고 힘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이 대한민국 안에서도 하루빨리 펼쳐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