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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5호 2005년 4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조상제한서' 몰락 관찰기

洪 珍 錫(경제82 -86) 세계일보 인터넷뉴스팀장
 기자생활 15년째. 10여 개 출입처를 거쳐왔습니다. 그중 IMF관리체제 돌입이전, 2년 가까이 출입했던 한국은행 출입기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옛 경제질서가 서서히 균열을 보이며 마침내 환란으로 폭발하기까지 고통스러운 여정의 관찰자였기 때문입니다. 국내 30대 그룹에 속했던 대기업들마저 잇따라 몰락하면서 `조상제한서'로 대표되던 한국금융시스템의 해체과정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서울대 출신 행장과 뱅커들의 낙마와 좌절도 잊지 못할 대목입니다.  돌이켜보면 이미 1996년 초부터 경제위기의 징후가 감지됐습니다. 당시 취재수첩과 기사들을 찬찬히 돌이켜보니 주가폭락, 환율급등, 금리상승 등 경제지표들의 움직임은 경제위기의 전조였던 것 같습니다.  경제부 기자들 사이에 한국은행은 금융에 대한 전문소양을 쌓을 수 있는 우아한 출입처로 꼽혔지만 경제위기 징후가 드러나기 시작한 1996년 초부터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한보철강, 기아자동차, 진로 등 국내 굴지 기업들의 최종부도는 한국은행 기자실에서 공식 발표됐기에 당시 출입기자들은 "우리는 기업부음 전문기자"라며 자조 섞인 농담도 주고받았습니다.
암울하지만 긴급한 기사를 대량으로 출고하기에 바빠 `결식기자'가 속출하기도 했지요.  당시 은행권 경제위기는 `조상제한서'의 붕괴로 요약됩니다. `조상제한서'는 조흥(설립 1897년)-상업(1899년)-제일(1929년)-한일(1932년)-서울(1959년)등 우리 은행산업을 이끌어온 5대 은행의 서열순 통칭이었습니다. 한국은행 출입발령 인사 직후 전임출입기자는 인수인계 설명 도중 `조상제한서'를 잊지 말도록 주문했습니다. 5대 시중은행의 창립순 서열을 존중하고 기사에서도 여러 은행의 사례를 나열할 경우에도 이 순서를 따라야한다는 관례를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5대 시중은행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의 성장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었다는 이유입니다. 서울대 출신들이 5대 시중은행 행장과 임원 가운데 절대다수를 차지했습니다. 행장의 경우 서울대 상대와 법대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할 때도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요즘 잘 나가는 신한․하나․한미은행 등 후발 신설은행들은 `2부 리그'로 대접받아야 했습니다. 주택은행과 국민은행은 서민금융전문 국책은행이란 이유로 진정한 은행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엄청난 부실을 안고 있었지만 5대 시중은행이 망할 것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96년에 접어들면서 `조상제한서'란 국내 은행산업의 질서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30대 그룹에 속했던 우성건설이 부도를 내며 관치금융의 문제점이 서서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후 중견건설업체였던 건영이 쓰러지는 등 숱한 업체들의 부도사태가 이어졌습니다. 마침내 1997년 1월 한보철강이 넘어지고 하반기에는 기아자동차, 진로 등 국내 굴지의 기업들마저 부도를 냈습니다. 결국 그 해 11월 IMF관리체제로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실기업에 대한 불법여신이 속속 드러나면서 뇌물 등 각종 비리에 연루된 은행장들이 구속됐습니다. 당시 리딩뱅크였던 제일은행은 은행장 2명이 잇따라 구속되면서 한국은행 출신을 행장으로 모셔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1997년 11월 IMF체제로 접어들면서 은행불패의 신화는 간단히 붕괴되고 은행권 역시 구조조정과 명예퇴직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어 수만명의 은행원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2005년 `조상제한서' 가운데 제일은행만 간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한보사태로 가장 먼저 된서리를 맞은 제일은행은 뉴브리지캐피탈, 영국 스탠다드 차타드 은행 등 두 차례나 주인을 바꾸며 명가의 전통을 되살리기 위해 안간힘입니다. 조선왕가의 자본참여로 시작된 조흥은행은 신한은행을 거느린 신한금융지주회사에 편입됐습니다.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은 우리은행으로 통폐합됐습니다. 서울은행은 하나은행에 합병된 지 오래입니다.  어쩌면 합병 뒤에도 족보를 계승한다면 은행서열은 `신우제하국(신한 우리 제일 하나 국민)' 5강으로 재편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같은 연조에 따라 매겨진 서열에는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익성과 고객서비스 그리고 주식가치가 이제 1등의 지표. 은행뿐 아니라 모든 경제부문이 무제한 시장경쟁시대에 접어든 당연한 결과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