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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호 2019년 7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토론'을 토론해 볼까요

느티나무 칼럼


김영희(고고미술사88-92)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본지 논설위원


지난달 오세정 서울대 총장과 인터뷰 할 기회가 있었다. “수재 소리만 듣고 자랐을 텐데 연구가 아닌 교육에 관심을 가진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라는 질문에 그는 미국 유학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외국 친구들은 언제나 자기 생각이 있더라. 질문을 던지면 늘 뭔가 답이 나오는 거다. 처음엔 ‘그게 말이 되냐’며 핀잔만 듣던 친구인데, 그렇게 6개월, 1년이 지나니 교수 입에서 ‘어, 그거 괜찮은데? 한번 해보자’라는 말이 나오더라. 반면 난 점수는 1등이었지만 늘 “아직 공부 중이라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라는 말만 했다. 틀릴까봐. 내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이게 한국 교육시스템의 문제구나 절실히 깨닫게 됐다.”


오 총장 정도의 ‘수재’ 소리를 듣고 자라진 못했지만 고개가 끄덕여졌다. 어릴 때부터 지식을 묻는 문제에 ‘정답’을 맞히는 데 익숙한 탓인지, 성인이 된 뒤에도 새로운 질문이 던져지면 ‘틀린 답이 아닐까’라는 자기 검열이 부지불식 중 작동하곤 했다. 기자생활 만 25년인데도 가끔 ‘남들에게 내 논리가 엉뚱하게 보이지 않을지’ 염려가 들곤 한다. ‘영어 울렁증’이 전국민의 병이긴 하지만, 문법이 틀릴까 걱정하는 정도도 유난한 것 같다.

서울대 졸업생 중 적잖은 이들이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지식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절감해온 우리 세대에게 ‘토론교육은 무조건 좋고 민주적인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마련이다. 실제 요즘 세대들은 토론식 수업에 익숙한 편이다. 줄지어 앉아 칠판 앞 선생님의 일방적 수업만 듣던 교실에서 원탁에 둘러앉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는 풍경이 늘어난 건 분명 반가운 변화다.    


하지만 두 아이들이 토론수업을 한다며 이것저것 물어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가끔 갸우뚱해질 때가 있었다. 대개는 찬반 조를 나눠 특정현안을 놓고 토론하는 식이다보니, 상대방 논리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는 데만 열심이 되는 것 같았다. 그 주제도 학생들이 자기 삶에서 접하기 쉬운 문제라기보다, 방송 토론프로그램이나 신문 사설의 단골 소재가 대부분이다. 주변에 물어보면 자료조사와 논점 정리까지 학부모 숙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하긴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생각해볼 거리’도 포털을 조금만 뒤지면 질문과 답이 통째로 실려있다. 이쯤 되면 의구심을 품어볼 만하다. 토론수업이 토론의 ‘기술’은 가르쳐주는데, 스스로 고민하고 자기 생각을 갖는 힘을 길러주는 걸까? 또 하나의 ‘지식배틀’이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예전보다 훨씬 좋은 교재에 훨씬 훌륭한 방식으로 배워 논리정연한 요즘 세대들이 혐오와 차별, 배타적 인식을 가진 모습을 적잖이 본다. 토론이나 논쟁은 ‘자기 생각’이 있다면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것이지, 먼저 배워야 할 ‘기술’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 토론이 상대방을 ‘제압’하는 게 아니라 이견을 좁히는 민주적인 토론을 지향한다면, 남과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최근 만난 네덜란드 출신 저명한 교육철학자 거트 비에스타는 “교육이란 자신의 욕망이 다른 이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음을 인식하고 이 세계에서 바람직한가, 라는 질문을 하도록 북돋아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흔히 교육계에서 청소년 시기 원탁 토론교육을 중시하는 데 비해, “훨씬 어릴 때부터 다양한 기술교육을 통해서도 ‘민주시민교육’이 이뤄질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은 흥미로웠다. 예를 들어 목재나 석재를 다루거나 정원 가꾸기 등을 하며 경험하는 ‘물질적 저항’과 ‘느린 속도’를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욕망이 현실에서 부딪치는 한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교육은 어디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