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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8호 2018년 1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강기동 박사, 1973년 대한민국에 반도체를 이식하다

모토로라 반도체연구소 총괄, 삼성반도체 Hynix 기틀 마련



삼성 반도체 전신인 한국반도체의 창업자인 강기동(전기공학53-57) 박사가 ‘강기동과 한국 반도체(아모르문디)’란 자서전을 들고 귀국했다. 그는 현재 미국 네바다주 리노에 살고 있다. 강 동문은 우리나라 반도체의 선구자로 불린다. 미국 유학과 모토로라 반도체 연구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1973년 한국 최초의 반도체 소자 제조 공장인 한국반도체를 설립했다. 설립한 그 해 10월 자금 사정 등으로 삼성에 매각됐지만 2년간 삼성 반도체 사장을 맡으며 한국 최초의 시계용 반도체 칩을 생산했다. 1983년 현대전자 반도체(현 SK Hynix)의 설립 작업을 자문하기도 했다. 지난 11월 2일 모교를 찾은 강 동문은 “처음 학교에 와 본다. 굉장히 넓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방문 일정이 어떻게 되세요.
“출판 기념회 하고 한국반도체 설립할 때 도와주셨던 김규한 사장 등 옛 지인들을 만납니다. 일주일 머물다 가요.”


-삼성이나 하이닉스 공장 견학 일정 등은 없으세요?
“없어요. 아는 사람이 있어야 초대도 받을 텐데, 한국에 아는 반도체 관계자가  없어요. 미국으로 돌아간 후 은둔하다시피 살았으니까요.”


-무슨 말씀이세요.
“한국반도체 설립은 모험이었습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미국의 첨단 기술을 유출한 반역범이 될 수도 있었지요. 모토로라 반도체연구소에 있을 때 군사 기밀 프로젝트도 수행했었고요. 그래도 조국 대한민국에 선진 반도체 기술을 이식하고 싶었습니다. 미국에 ICII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한국에 그 조립 공장을 만드는 식으로 포장을 했지요. 회사 설립까지는 문제없었지만 막상 공장을 지으려고 할 때 중동전쟁이 터져 돈 문제 등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창립은 했지만 오래가지 못했지요. 삼성에서 인수 후 기술 지도를 위해 2년간 사장을 맡았다가 미국으로 돌아왔지요. 미국에서 다시 반도체 업계에 복귀할 수는 없었고요.
기술 유출이 탄로날 수 있었으니까요. 알고 지내던 반도체 관계자들을 최대한 피하면서 살았어요. 힘든 시간이었죠.”


-미국에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1980년 돌아와서 10년 동안은 일정한 일이 없었어요. 간간이 베트남 전쟁 때 사용하던 진공관 무전기를 수리하고 전자기기 고쳐주는 일을 했죠. 아내와 싸우는 날이 많았어요. 아내는 한국 갈 때부터 반대를 했거든요. 1970년대만 해도 한국이 못 사는 나라였잖아요. 특히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아내가 3개월 전에 먼저 저 세상에 갔는데, 아이들(남매) 결혼도 제대로 못 시키고 갔다고 울던 모습이…. 모든 게 엉망이 됐지요.”


-그래도 지금은 좀 나아지신 거죠?
“1990년쯤 파워 서플라이를 개발해서 다행히 먹고는 살았죠. 아내와 KDK란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저는 열심히 만들고 아내가 마케팅 등 전반적인 관리를 했죠.”


-뭘 만드는 걸 좋아하신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새로운 것을 만드는 데 흥미를 느꼈어요. 경기중학교 시절 효자동에 사는 김위녕이라는 친구 집에 갔다가 소형 냉장고 만한 전기 축음기를 봤습니다. 전기음향 제품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참 부러웠습니다. 부모님을 졸라 라디오를 구입했죠. 또 동네 정태범이라는 형이 있었는데 라디오 도사였습니다. 이 형이 광석 라디오도 만들어줬어요. 그때부터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청계천 3, 4가 전기고물상을 들러 온갖 장비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죠.”


-라디오에 대한 관심이 HAM(아마추어 무선통신)으로 이어진 건가요? 대한민국 1호 아마추어무선통신사이기도 하신데.
“그런 셈이죠. 전쟁통에 우연히 미국 아마추어무선연맹 월간지인 QST와 라디오 아마추어 핸드북(The Radio Amateur’s Handbook)을 접했어요. 열심히 사전을 뒤져가며 읽었지요. HAM에 대한 많은 것들을 알게 됐죠. 고등학교 때는 물리반을 차려 친구, 후배들에게 HAM 바람을 불어넣었죠. 일본 무선국들과 정말 재미있게 교신을 했습니다.”


-당시 서울대에 통신공학과가 있었는데 전기공학과로 입학하셨네요.
“통신공학과에 가고 싶었는데, 모집 정원이 적어서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입학하고 나서 전과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막상 입학하고 보니 통신과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실망이 컸어요. 친구들과 무선통신 활동을 하며 송신기 제작하고 그랬죠. 그때 체신부가 주관하는 아마추어무선통신사 면허증도 땄고요. 혼자 시험 쳐서 혼자 합격했습니다.
그 당시 함께 활동했던 이인관, 김규한, 서정욱, 김세대, 김형실, 정혜선, 배명승 씨 등이 반도체 사업을 할 때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대학 졸업 후 미 오하이오주립대로 유학을 가셨는데, 국비 장학생으로 가신건가요?
“할아버지 도움으로 갈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좋은 기술 많이 배워 와서 이 가난한 나라를 위해서 큰일을 해 달라고 하셨지요. 미국 가서는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마련했습니다.”


-세계적인 반도체 개발자인 강대원 동문이 선배셨죠?
“경기고, 서울대 전기과, 오하이오 주립대 전기과 모두 선배세요. 제가 오하이오 주립대 갔을 때 강 선배는 박사과정을 마치는 시점이었어요. 강 선배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결혼식 모든 경비와 신부 의상도 마련해 주셨어요. 일본에서는 강 선배를 LED로 노벨상 받은 레오 에사키 박사와 동격으로 대접했죠.”


-모토로라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반도체 연구소에서 새로운 반도체를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용도를 정해놓고 하는 게 아니라 먼저 만들고 용도를 찾는 식이었죠. 미 국방부 극비 프로젝트인 ‘Minuteman(대륙간 탄도탄)’에 관련된 일도 했지요. 특히 반도체 제작 공정에서 중요한 물, 가스의 순도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방법을 찾았어요.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불순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순도 환경을 위해 반도체용 약품을 따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해 이게 업계 표준이 되기도 했죠.”


-말씀하신 대로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전기, 물 등이 무척 중요한데, 1970년대 초 한국은 열악한 환경이었을텐데요.
“무척 힘들었죠. 반도체 전 공정이 머릿속에는 다 있는데, 실제 구현하려니까 부딪히는 문제들이 많았어요. 우선 장비들을 전부 미국에서 가져와야 하는데 당시 세관 목록에 없던 것이 많아 막히기 일쑤였고요. 가져와서도 이동과정에서 망가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지요. 전기 공급이 끊기는 적도 간혹 있었고요. 반도체에 대한 이해도도 낮아 정부 관계자나 업계 사람들을 만나 도움을 구하기도 힘들었어요. 당시 큰 전자회사도 조립 수준에 머물 때라 제가 하는 일을 비현실적인, 불가능한 일로 여겼던 것 같아요.”


-그래도 그때의 고생이 반도체 강국의 밑거름이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요. 1983년 64K DRAM 개발로 우리나라 메모리 반도체 분야 개발이 가속됐는데, 그 반도체가 삼성 부천 공장에서 나왔습니다. 제가 처음 설계했던 C-MOS 생산 라인을 외부에서 만든 N-MOS 공정으로 하향 조정해 제작할 수 있었던 겁니다.”


-건강하시지요?
“느즈막이 춤을 배웠어요. 춤 선생을 할까 생각할 정도로 즐겁게 했지요. 눈에 이상이 와서  불편한 거 빼고는 괜찮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나의 원천기술을 발전시키고 성공시켜 준 삼성전자와 SK Hynix, 고맙습니다. 그리고 저를 믿고 전 재산을 투자해 주셨던 김규한 사장과 미국에서 함께 와준 동료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단 말을 전합니다. 그 분들 덕분에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 됐기에 자부심을 가져도 될 겁니다.” 김남주 기자


강 동문은


1934년 12월 9일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경기고를 거쳐 모교 전기공학과에 진학했다. 고교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아마추어 무선통신(HAM)에 남다른 애착을 품고 대한민국 1호 아마추어무선통신사 면허증을 취득했으며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KARL)의 창립을 주도했다. 대학 졸업 후 195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오하이오주립대 반도체연구소에서 본격적으로 반도체 연구에 뛰어들었고 연구 성과를 인정받으며 석·박사 학위를 2년 반 만에 받았다.


이후 1962년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위치한 모토로라에 입사, 반도체 연구소를 직접 꾸리고 최첨단 반도체 생산 기술을 연구해 당시의 반도체 분야를 선도했다. 1969년에는 실리콘밸리의 스튜어트 워너 사로 자리를 옮겼으며, 한국에 반도체 제조 기술을 이식하겠다는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한 본격적인 작업을 준비했다. 1973년, 마침내 미국 내에 ICII 사를 설립하는 동시에 경기도 부천에 한국 최초의 반도체 소자 생산 공장인 한국반도체주식회사를 세웠다. 이후 제4차 중동전쟁으로 인한 오일쇼크를 이겨내고 C-MOS/LSI KS-5001 전자손목시계용 칩을 개발해 큰 성공을 거뒀다. 한국반도체주식회사가 삼성 그룹에 인수되면서 좌절을 맛보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반도체 사업에 뜻을 품은 한국 대기업들의 자문 요청에 응하여 원진전자와 현대전자 등의 설립에 관여했다. 현재 미국 네바다주 리노에 거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