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호 2005년 2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宋 春 鍾(59년 農大卒)前농촌진흥청 농기계연구소장
50년전 일기보니 `보릿고개'가 눈앞에 池교수의 "살아 있는 사람되라" 생생
`2월 25일 금요일. 야간열차로 광주에서 9시간이나 걸려 수원에 도착했다. 3월 2일 수요일. 지난 3일간 농대에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4월 5일 화요일. 입학식을 마치고 등교가 시작되면서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이것은 꼭 50년 전인 1955년의 내 일기에 있는 내용들이다. 요일까지도 50년 후인 올해와 꼭 같고 보니 더욱 흥미롭다. 그 일기 이야기를 좀 더 계속해 보자. `5월 1일 일요일. 난생 처음으로 서울 나들이를 했다. 도로 한복판을 달리는 電車라는 것을 처음 보았고, 지붕까지 덮은 커다란 간판들이 즐비하고 거리에는 자동차와 인파가 넘친다.' 1950년 6월에 끊긴 한강인도교 대신 아래쪽에 가설한 부교로 건너다니던, 서울 인구가 고작 1백57만명일 때의 이야기다. 5월 7일 일기를 보면 숲이 울창한 연습림에서 농학과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학장대행이던 池泳鱗교수님의 당부 말씀은 요즘 사람들에게도 귀감이 될만한 내용이다. 첫째 기술자로 만족하지 말고 과학자가 되어라. 둘째 살아 있는 사람이 되라. 산 듯 죽은 듯, 있는 듯 없는 듯, 그런 사람이 되지 말라. 셋째 참 친구를 가져라. 친구는 경쟁자도 되고 희생으로 서로를 돕는 사이가 돼야 하는 것이다. 10월 17일에는 咸錫憲선생의 특강이 있었는데, "역사에는 결단을 내려야할 순간이 있는 것"이라고 갈파하던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6ㆍ25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을 때 대학에 입학했다. 수원은 서울로 통하는 길목이었고, 유엔군과 북한군이 번갈아 주둔했던 농대는 시설들이 폭격과 화재로 큰 피해를 입어 폐허나 다름없었다. 강의실이 모자라 서너 개 학과씩 합동강의를 했고, 교수가 읽어주면 학생은 정신 없이 받아쓰는 것이 그 시절의 대학 강의였다. 교과서라고는 몇몇 인문사회과목 뿐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고등학교 때는 자취를 했지만 수원에서는 하숙을 했다. 그때 하숙비는 쌀 한 가마 값인 9천환 안팎이었다. 1955년에 입학한 우리는 교복을 처음으로 입었던, 서울대학교 교복 1기생이다. 베레모 모양의 교모와 윗주머니에 세로로 지퍼가 달린 교복 값은 얼추 두 달 하숙비인 1만5천환이었다. 수원은 그때 시내버스도 택시도 없는 인구 7만명인 조그만 도시였다. 수원은 正祖가 華城을 쌓고 西湖를 만들어 王都를 옮기려고 했던 곳이기도 하다. 농대와 수원, `수원 하면 농대'가 떠오르는 곳이다. 수원은 1906~1907년에 勸業模範場(농촌진흥청의 전신)과 수원농림학교(농대의 전신)가 자리잡으면서, 지난 1백년동안 근대농업의 요람이요 메카로 큰 몫을 해온 곳이다. 우리 민족의 숙원이던 쌀 자급이 실현되면서 굶주림의 상징이던 `보릿고개'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이렇게 綠色革命을 이룩하고 엄동설한에도 싱싱한 채소와 과일을 마음껏 즐기는 세상을 만들어낸 주역이 농민들과 함께 우리 농대출신들이다. 수원 서둔벌에서 지난 1백년 세월을 함께 해온 우리 농대가 서울 관악캠퍼스에 새 둥지를 틀었다. 2만3천 동창회원들은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상록의 아들들이여, 비상의 날개를 더 높이 더 멀리 펴기 바란다. 아자 아자 아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