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호 2005년 2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50위권에 드는 대학이 되려면
얼마 전 신문에 서울대학교가 미국에서 배출하는 박사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은 학생을 공급하는 학부를 가진 대학교로 소개됐다. 캘리포니아주의 버클리 다음으로 서울대학교인 것을 보면 한편 의외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동안 많은 학부졸업생이 미국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했다. 우리 서울대학교의 학부학생은 이렇게 우수하다고 자부한다.
몇 년 전의 일이었다. 외국에서 오래 살았던 친구와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서울대 학부학생들의 자랑을 했더니 그 친구로부터 뼈있는 대답을 들었다. "서울대의 부실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서울대 출신이 우수한 것은 학생들의 자질 때문이지 교수진이나 서울대학교가 교육을 잘한 것은 결코 아니다"라는 대답이었다.
나 자신 그렇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 우리 서울대학교의 이공계통은 온통 논문의 인용도수를 집계하는 SCI(Science Citation Index)에 수록된 논문수에 교수들의 업적 평가를 하는 큰 기준으로 쓰고 있다. 따라서 발표 논문수를 불리려는 노력 때문에 연구에만 몰두하고 우리의 장래인 학부학생의 교육에는 매우 소홀한 점이 눈에 띈다. 논문의 숫자가 그렇게 중요할까? 물론 평균적으로 볼 때 논문수가 많은 교수는 좋은 연구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대학에서 천편일률적이고 정량적인 잣대를 각 분야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데는 무리가 있다. 필자가 1972년 교육부로부터 연구비 30만원을 받은 바 있다. 그 당시 연구비 지급의 조건으로서 "최종보고서는 50페이지 이상이어야 한다"라는 단서가 붙어있었다. 아마 그 당시 생각으로는 양이 중요하지 질은 2차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했나보다. 그러나 80년대가 되면서 `기초과학연구소지원사업'이란 명칭의 문교부(현재 교육인적자원부)연구비가 각 대학의 기초과학연구소에 배당된 적이 있다. 그 당시의 기준은 두 명 이상의 외부 심사를 거치는 학술지에 발표한 것만을 논문으로 인정하지 교내학술지(예 : 연구논총)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많은 대학에서 이런 잣대가 옳지 않다고 항의를 해왔다. 그들은 우리 대학의 논총이야말로 세계에서 모두가 인정한 일류학술지라는 것이 내세우는 이유였다. 그러나 기초과학연구소 지원사업 위원회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맞을 수도 있지만, 대학논총은 외부에 판매되지 않으며 공정한 외부 심사위원이 없으므로 객관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했다. 그로부터 논문은 반드시 국제적으로 인정된 학술지에 국한된다는 전통이 생겼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SCI 학술지 논문이 중요한 자격요건의 핵심을 차지하게 됐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량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자료이어야지 몇 편 이상이어야만 자격이 있다는 식의 발상은 그 옛날 문교부 지침인 몇 매 이상이라는 근으로 무게를 재는 발상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서울대학교는 이러한 형식상의 규정을 없애야 한다. 과거 몇 년 동안 단 한편의 논문이 없더라도 그 교수의 장래성과 과거의 업적을 보아 그 해당 학과에서 재량 것 결정토록 위임해야 한다. 좋은 논문을 쓰는 교수만이 아니라 학부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교수 역시 그 응분의 대우를 받는 풍토가 생겨야 한다. 교수 채용 역시 해당 학과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고 우수한 교수가 나타날 때는 규정에 얽매이지 말고 유치할 수 있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화시대에는 기업들이 무한경쟁에 나서듯 대학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필요 없는 규제는 없애고 기본 상품인 학부교육에 충실하며 대학이 유연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서울대학교가 세계 50위권에 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삼성 같은 기업이 세계의 일류기업이 된 것은 유연한 경영과 기본에 충실한 결과로 생각되며 서울대 역시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나 자신 그렇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금 우리 서울대학교의 이공계통은 온통 논문의 인용도수를 집계하는 SCI(Science Citation Index)에 수록된 논문수에 교수들의 업적 평가를 하는 큰 기준으로 쓰고 있다. 따라서 발표 논문수를 불리려는 노력 때문에 연구에만 몰두하고 우리의 장래인 학부학생의 교육에는 매우 소홀한 점이 눈에 띈다. 논문의 숫자가 그렇게 중요할까? 물론 평균적으로 볼 때 논문수가 많은 교수는 좋은 연구를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대학에서 천편일률적이고 정량적인 잣대를 각 분야에 그대로 적용하려는 데는 무리가 있다. 필자가 1972년 교육부로부터 연구비 30만원을 받은 바 있다. 그 당시 연구비 지급의 조건으로서 "최종보고서는 50페이지 이상이어야 한다"라는 단서가 붙어있었다. 아마 그 당시 생각으로는 양이 중요하지 질은 2차적인 문제라는 생각을 했나보다. 그러나 80년대가 되면서 `기초과학연구소지원사업'이란 명칭의 문교부(현재 교육인적자원부)연구비가 각 대학의 기초과학연구소에 배당된 적이 있다. 그 당시의 기준은 두 명 이상의 외부 심사를 거치는 학술지에 발표한 것만을 논문으로 인정하지 교내학술지(예 : 연구논총)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내세웠다. 많은 대학에서 이런 잣대가 옳지 않다고 항의를 해왔다. 그들은 우리 대학의 논총이야말로 세계에서 모두가 인정한 일류학술지라는 것이 내세우는 이유였다. 그러나 기초과학연구소 지원사업 위원회에서는 그러한 주장이 맞을 수도 있지만, 대학논총은 외부에 판매되지 않으며 공정한 외부 심사위원이 없으므로 객관성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했다. 그로부터 논문은 반드시 국제적으로 인정된 학술지에 국한된다는 전통이 생겼다. 그러한 연장선상에서 SCI 학술지 논문이 중요한 자격요건의 핵심을 차지하게 됐다. 그렇지만 이러한 정량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참고자료이어야지 몇 편 이상이어야만 자격이 있다는 식의 발상은 그 옛날 문교부 지침인 몇 매 이상이라는 근으로 무게를 재는 발상과 크게 다른 점이 없다. 서울대학교는 이러한 형식상의 규정을 없애야 한다. 과거 몇 년 동안 단 한편의 논문이 없더라도 그 교수의 장래성과 과거의 업적을 보아 그 해당 학과에서 재량 것 결정토록 위임해야 한다. 좋은 논문을 쓰는 교수만이 아니라 학부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교수 역시 그 응분의 대우를 받는 풍토가 생겨야 한다. 교수 채용 역시 해당 학과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고 우수한 교수가 나타날 때는 규정에 얽매이지 말고 유치할 수 있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화시대에는 기업들이 무한경쟁에 나서듯 대학도 예외일 수는 없다. 필요 없는 규제는 없애고 기본 상품인 학부교육에 충실하며 대학이 유연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서울대학교가 세계 50위권에 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삼성 같은 기업이 세계의 일류기업이 된 것은 유연한 경영과 기본에 충실한 결과로 생각되며 서울대 역시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