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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호 2017년 7월] 뉴스 단대 및 기과 소식

6월 항쟁 30주년 기념식 ‘다시 아크로에서’ 개최

80년대 학번 300여 명 참석 민주화, 동문 역할 재조명


6월 항쟁 30주년 기념식 ‘다시 아크로에서’ 개최


80년대 학번 300여 명 참석
민주화, 동문 역할 재조명



지난 6월 10일 모교 관악캠퍼스 문화관 중강당에서 6월 항쟁 30주년 서울대 동문 기념식 ‘다시 아크로에서’가 개최됐다. 행사 참가자들이 아크로 광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30년 전 최루탄 연기를 뚫고 대통령직선제를 쟁취한 관악의 주역들이 다시 모였다. 이마의 주름과 희끗희끗한 머리에도 불구하고, 6월 항쟁을 함께한 학우들은 서로의 얼굴을 쉽게 알아봤다.


6월 항쟁 30주년 서울대 동문 기념식 ‘다시 아크로에서’는 1987년 당시 1~4학년이던 20여 명의 84~87학번 동문들이 준비했으며, 300명 가까운 동문들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행사 취지에 동의한 동문은 500명이 넘었고, 자발적 후원금도 2,000만원을 훌쩍 넘겼다.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이러한 변명 속에 1987년 1월 숨진 박종철(언어84입) 열사는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이날 행사에는 열사의 형인 박종부 씨도 참석했다. 기나긴 박수 소리가 끝나자 그는 “5·18 기념식에서 문 대통령이 몇몇 열사의 이름을 불러주어 많은 국민들이 감동했다. 하지만 이름 불리지 못한 많은 열사들의 부모가 있다. 6월 항쟁의 주역인 여러분이 앞장서서 그들을 기억하고, 부모의 눈물을 닦아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찬욱(정치72-76) 교육부총장은 축사에서 “대학의 공공성 확보를 위한 노력이 오늘 행사로 결실을 맺었다”고 말했다.


‘6월의 노래’, ‘그날이 오면’,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등 참가자들의 눈시울을 붉힌 것은 서울대의 자랑인 ‘메아리’ 84~88학번들의 노래다. 세 곡 모두 메아리가 직접 만들어 모두 함께 불렀다.


공연을 기획한 안정일(항공우주90-95) 동문은 “메아리의 옛 인기곡들을 학우들 앞에서 다시 부르기 위해 적잖이 연습했다”고 말했다. 타임머신 ‘메아리’를 타고 1987년으로 돌아간 참가자들은 문화관 중당강 실내 행사를 마치고 아크로폴리스 광장으로 향했다. 교문 밖에 최루탄도 ‘닭장차’도 전투경찰도 없는 아크로 광장은 평화로웠다. 어깨 걸고 옛 노래를 부른 뒤 기념촬영이 이어졌다.


관악의 6월 항쟁을 이끌었던 당시 총학생회장은 지금 대학교수가 됐다. 이남주(경제84-89) 성공회대 교수는 “대한민국 민주화에 소중한 역할을 해온 모교의 전통이, 모교 재학생과 후배들에게 자부심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6월 항쟁 1년 전인 1986년 서울대 전체 학생 수의 6.9%에 해당하는 1,523명이 연행됐다. 이 교수는 이런 희생이 한국사회 발전과 민주화에 적잖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서울시청 앞에서 박종철 열사 30주년 추모행사를 주도한 조흥수(사회복지85-90) 동문은 “박종철 열사의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 ‘1987’(가제)의 연내 개봉을 계기로 6월 항쟁의 직접적 계기인 박종철 치사 사건이 조명되고, 고문과 투옥에 맞선 열사의 죽음이 촛불처럼 소중히 간직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참고기사(제471호) : “30년전 6월 항쟁의 기억이 촛불항쟁 끌어냈다” 6월 항쟁 30주년 특별좌담회

http://snua.or.kr/magazine/view.asp?seq=13432&gotopage=1&startpage=1&mgno=&searchWord=&mssq=02002000




참석 후기


유승하(서양화86-90)


6월10일은 선약이 있었다.

두달전쯤 잡아놓은 터라 동문모임에 가게 되리라 생각을 못했다.


관악에서 골목대장처럼 유명했던 선배가 동문 모임에 오라고

얼마전부터 문자를 했다. 반쯤 듣고 반쯤은 흘렸다.


87년 기억은 사람을 복잡하게 꼬이게 만든다.

현실 생활이 녹녹치 않아 과거를 정리할 만한 여유도 없다.

졸업후 힘들 때면 대학생활이 원망스러운 적도 여러번이었다,

원망의 대상도 막연했다. 나의 실수나 판단 착오가 떠올라

자다가도 몇 번씩 이불을 걷어차기도 했었다.


6월10일. 선약이 마침 서울대 근처였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끝났다.

가자,가야지...떠올리기 힘든 몇가지로 과거를 부정하기는 싫다.

익숙했던 모교가 낯선 망망대해처럼 느껴진다.

문화관을 가야하는데 착각하고 후생관으로 갔다


사람 만나기 좋아했던 예전의 나는 어디로 가고

요즘 내 모습은 골방지킴이. 금방 상경한 사람마냥 길을 찾아 헤맸다.

학생들에게 물어보면서 문화관을 갔다, 아...그래. 여기가 문화관이었지.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 행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아는 사람들이 연달아 보인다.

나이 먹은 모습인데 우리들끼리만은 과거 모습과 연결된다. 신기했다.

나를 부른 ○형도 봤다. 미울 때도 많았는데 막상 보니 또 반갑다,

세월이란 게 그런가 보다,


이남주 선배는 학생이 아닌 교수님인데 오늘은 총학생회장으로 보인다,

온갖 학생회 실무를 맡아 하던 홍양현 선배는 오늘도 여전히 바쁜 듯 보였다.


아크로 계단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데 재학생들이 쳐다본다.

‘민주(?)해병전우회??또는 재향군인회?’까지는 아니더라도

늙은 중년들의 자족적인 단합대회로 보이면 어쩔까 걱정이 들었다


나랑 함께 일하던 공대 후배를 만났다, 비명지를만큼 반가웠다,

서로 같은 단과대학이 아니라 졸업 후 만날 일이 없었다,

물론 연락처도 모르고. 보고 싶은 마음만 담고 살았다


소식은 끊어졌지만 그때처럼 여전히 열정적으로 살고 있을 테지.

함께 친했던 사회대 친구도 만났다. 우리 셋이 일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반가운 마음만 남아서 아이들처럼 폴짝폴짝 뛰었다,

공대 후배가 그 옛날 지나간 일화들을 이야기해준다,

난 속상한 일만 떠오르는데 후배가 이야기를 풀어놓으니

땅바닥이 일어설 만큼 배를 잡고 웃었다.오랜만에 이렇게 웃는다.

또다른 사회대 친구도 만났다. 넘 반가운데 이름도 기억이 안난다.

실례가 되지만 염치없게 목에 걸고 있는 이름표를 넘겨보면서 인사했다.

20대 귀여운 추억들이다.

이젠 내 자녀또래들 모습. 부모 나이인 내가 과거의 나를 안아주고

힘들었던 일들 위로해주고 싶다. 더 이상 자다가 이불 걷어차지 말라고.


단과대 선후배와 함께 우리 다녔던 건물을 돌아서 정문으로 나왔다,

이 드넓은 대학교를 어떻게 걸어다니고 대자보 붙이고 찌라시 들고 다녔을까.

정문을 조금 남겨놓고 힘들어서 지나는 택시를 잡았다,

뒷풀이 장소를 가려고 하는데 장소를 모르겠다.

같이 탄 후배가 ‘아저씨 녹두거리 가주세요.’ 우리가 막 웃었더니

다시 ‘아저씨 289 종점요’하고 농담을 한다.

택시에서 내려서 뒷풀이 장소를 찾느라고 그 옛날 서점 ‘그날이 오면’ 앞으로 갔다.

‘그날이 오면’ 책방은 없어졌지만, 그 앞에 잠시 서 있더랬다. 그날이 오늘일까.

적어도 우리, 6월10일 오늘 하루는 ‘그날’처럼 보냈다.



이성은(외교87-92)


어머니와 이모를 모시고 문화관의 정취를 다시 느끼고도 싶었고 정부에서 하는 6.10 기념행사도 여건만 허락되면 가곤 했기에 이번 모임은 꼭 가려고 마음먹었고 과친구들 밴드에도 올렸습니다.


못갈뻔한 상황있었지만 그냥 상황 뛰어넘고 갔네요.

일찍 와서 준비하는 모습도 보고 주변도 둘러봤습니다.

사진전 뜻밖에 좋았습니다.

어머니와 이모가 관심있게 자세히 보시네요. 아 그때 그랬구나 하시면서.


메아리 공연은 정말 연예인을 보는 느낌ㅋ

노래들은 가슴을 뜨겁게 했습니다.

예전 제가 알던 익숙한 노래들 말하자면 타는 목마름으로나 광야에서 바다 가 나왔으면 훨 더 좋았을텐데 아무래도 제가 모르는 노래에는 감정이 따라가기가 버겁네요.


저는 앵콜곡이 너무 좋았지만 운동권 투쟁 분위기가 느껴지셨는지 어머니는 조금 무섭다고 하시기에 ㅎㅎ 설명해 드리고 마음 달래드렸습니다.


아쉽게도 학술발표시간은 유익했지만 그 당시 가투핵심조직에겐 뿌듯함이었을 시간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겐 아주 약간은 소외감이 들게 하는 시간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쉽게 이모가 가게에 나가야 할 시간이 되어 다 참석못하고 중간에 나갔지만 진행팀에서 친절하게 김밥도 챙겨주시고 좋았습니다.

두 분 모두 좋았다고 다음번에도 이런 모임있으면 또 오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제 고교동창밴드에도 메아리노래와 함께 사진을 올렸습니다.

담임선생님도 서울대 사대시거든요. 전교조로 퇴직당하신..

다 메아리세대지요. 고등학생때도 다 돌려가며 악보구해보고 기타로 치고 그랬으니까요. 그때 메아리 노래는 7, 80년대 세시봉 같은 거죠. 오늘도 그 때 준 메아리 책 보고 예전 느낌에 젖어 기타를 들어봤습니다.


올해 안에 한번 더 학교 재정 도움 받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동문 가족 동문 친구들이 와서 매상올려주고 홍보 효과 있다고 꼬셔보세욥ㅋ

아크로에 천 명 채우는 것도 가능하다고 봐요. 4.19세대는 거동 불편하신 분들 계시겠지만 한일협정반대부터 6.10 그리고 그이후 촛불들까지는 서울대생이 아니어도 민주주의 사랑하는 사람은 서울대 아크로 그 자리에 대한 로망이 있을 듯..

서울대 교정 안에는 들어가고 싶어도 공연히 이상해서 못 온 청춘들이 전국에 많거든요. 그들에게 메아리 노래를 들려주고 함께 부르게하고 또 죽어간 열사들을 기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