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호 2017년 6월] 뉴스 기획
“30년전 6월 항쟁의 기억이 촛불항쟁 끌어냈다”
6월 항쟁 30주년 특별좌담회
서울대 80년대 학생운동 조명
‘1987년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거행한 5·18 희생자 추모 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경찰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을 조작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사건 은폐에 경찰 수뇌부까지 깊숙이 개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동안 쌓인 학생과 시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5월 27일 서울대생 8,000여 명은 29일까지 동맹휴업을 결의한 뒤 2,000여 명이 신림동까지 나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후 시위는 각 대학교로 퍼져나갔다.’ (서울대 70년사 ‘학생운동’ 편에서)
올해는 6월 항쟁 30주년이다. 역사의 변혁기마다 리딩 그룹을 자처했던 서울대인들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민주화의 성지였고 학생 운동의 메카였다. 80년대 서울대 입학생들은 ‘누가 조국으로 가는 길을 묻거든 눈 들어 관악을 보게 하라’는 시구를 들으면서 시대와 조국의 사명을 생각했고 사회에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민주화 운동의 한복판에 섰던 다섯 명의 동문을 만나 당시 학생운동을 재조명했다.
참석자
김종민(국문83-92) 국회의원
이왕준(의학83-92) 명지병원 이사장
고 훈(경제84-90)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
이남주(경제84-89)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
이종일(공법84-94) 벨소프트 대표
지난 5월 28일 서울 여의도 IFC몰에서 80년대 학생 운동의 한복판에 섰던 다섯 명의 동문을 초청해 6월 항쟁 30주년 기념 특별좌담회를 개최했다. 왼쪽부터 이남주 이왕준 김종민 고훈 이종일 동문.
김종민 “이념 지향성 강한 서울대 학생운동 정권이 집중 탄압”
이왕준 “관악 캠퍼스는 민주주의 시민의식 등 큰 가치 공유한 용광로”
고 훈 “학생들이 꺼낸 직선제 화두…거국중립내각 논의로 연결”
이남주 “인생좌표 정할 때 민주화 항쟁 당시의 기억 떠올려”
이종일 “87년 6월 19일 아크로폴리스 메운 2만학우 보며 울었죠”
-30년 전 당시 활동 상황을 말씀해 주세요.
이남주 : 1987년에 총학생회 회장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봄에 선거해 4월 취임을 했습니다. 6월 항쟁까지 활동하고 8월 구속됐어요. 당시 아크로폴리스 광장이나 대학 내에 엄청난 학생들이 몰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렇게 많은 학생이 모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기억으로, 지금도 여러 가지 인생의 좌표를 정할 때마다 의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종일 : 법과대학 학생회장을 맡았습니다. 남주가 이야기했지만 연설할 때 ‘2만 학우’란 단어를 많이 썼는데 사실 공허한 말이었어요. 1987년 6월 19일 정말 2만 학우가 모였습니다. 음대, 미대, 공대생 모두가 참여했지요. 하이힐 신고, 백 메고 온 여학우도 있었고요. 울면서 연설했던 기억이 나요. 2학기 때는 총학생회 부학생회장을 맡았습니다.
고 훈 : 1986년 8월에 구속돼 1987년 6월 항쟁 들어가기 전 5월 말에 집행유예로 나왔습니다. 6월 항쟁은 고향인 제주도에서 맞았죠. 구속되고 나오면 위축될 법도 한데 6월 항쟁을 보고 그럴 상황은 아니었어요. 친구들이 이 열기를 어떻게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느냐 해서 다시 서울로 올라왔고, 구속청년학생협의회(구청협)에 들어가 활동을 했죠. 2학기 때 이남주 회장이 구속되는 바람에 총학 재건운동에 들어갔고 거기서 종일이가 부학생회장을 맡고 82학번 박홍순 선배가 회장을 했죠. 저는 선거기획, 연설문 작성을 담당했습니다.
이왕준 : 86년 5월 구속돼 감옥에 있다가 12월 나와 무기정학 상태서 6월 항쟁을 맞았습니다. 박종철 고문사건 터지고 변협에서 한 공청회에 나가 증언을 했다가 3, 4개월을 요시찰 대상이 되기도 했죠. 학생회 임원들이 주로 84학번이라, 83학번인 저는 후배들 챙겨주고 조언해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학생회 주요 이슈가 대선이었습니다. 서울대 총학은 후보단일화를 기본 입장으로 주장했고 고려대가 비판적 지지, 연세대가 70%는 후보단일화, 30% 비판적 지지였던 것 같아요. 그때 서울대와 고려대가 6월 항쟁까지는 민주화의 기치로 같이 가다 6·29 이후 후보단일화와 비판적 지지, 일부 독자 후보 학생 운동이 분열되는 상황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종민 : 1987년 6월 항쟁 때는 기결수로 대구교도소에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누나가 면회 오시면서 ‘최루가스가 너무 심해 버스타고 오기 힘들다, 나라가 난리가 난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아버님이 오셔서는 ‘대선 때 김대중 찍으면 너 빨리 나올 수 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웃음) 감옥에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도 후보단일화와 비판적 지지를 두고 논쟁이 치열했습니다. 안에서는 후보단일화가 소수였어요. 후보단일화 주장하다가 사상이 불순하다고 욕도 많이 먹고. 노태우 정부 출범할 때까지 그 역사의 대변혁기를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신문이나 사람들 통해 밖의 상황을 접했습니다.
1986년 구속됐는데 구속 전에는 인문대 학보사 지향의 편집장이었습니다. 학생운동에서도 그런 쪽으로 풀려 1986년 4학년 때 ‘100만 학도’라는 대학 연합 신문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서울대 대표로 저하고 몇 사람 참여하고 연세대 대표가 이광재, 안희정지사는 고려대서 배포 조직 총괄 역할을 했지요. 이후 ‘해방선언’이라는 신문을 만들었는데 광주 항쟁을 날카롭게 비판한 논조가 문제돼 국가보안법으로 구속이 됐죠. 2년 넘게 살았어요. 제가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6월 항쟁 일어날 거라 별로 기대하지 못했고 ‘이 어두운 밤을 버티어 보자. 버티면 이긴다’는 그런 분위기 정도였어요. 감옥 안에서 역사의 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상당히 고무됐고, 1988년 노태우 대통령 취임 특사로 나왔지요.
이남주 : 잘 알다시피 국면의 전환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시작됐습니다. 5월에 분위기가 확 올라왔죠.
-대중적으로 민주화 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87년 당시 서울대 학생운동은 상대적으로 조용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종일 : 이 자리에 있는 이남주·고 훈 동기, 김종민·이왕준 선배를 비롯해 서울대 83, 84학번 등 의식 있는 운동권들이 86년도에 많이 구속된 게 큰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 87년 민주화 열기가 타오를 때 활동할 수 있는 83, 84학번들이 몇 없었어요. 감옥에 가 있어서. 그럼에도 가두 투쟁이나 학내 집회 등 서울대의 민주화 열기는 식지 않았습니다. 단지 활동가 조직이 상대적으로 위축돼 있었던 거죠.
이남주 : 1987년 상황만 보면 안 되고 80년대 초반부터 전반적인 과정을 봐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상당히 주도적이고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다만 85, 6년도에 엄청난 숫자의 학생이 구속되고 상대적으로 적극적 활동가 수는 줄어들었지만 대중적으로 가장 많은 서울대 학생들이 참여했습니다. 당시 1학년 학생들은 거의 학내 집회에 참여했습니다.
이왕준 : 87년 이후 전국적 집회 있을 때 서울대에서 마이크 잡고 앞에서 리드하는, 전대협 세대의 의장을 못해 그런 이미지를 받은 듯합니다. 사실 이한열 열사 추도식까지는 남주가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았죠.
김종민 : 민주화운동청년연합에서 두꺼비를 상징으로 내세웠는데, 두꺼비는 뱀에 잡아먹힌 후 자기 새끼는 그 속에서 잉태시켜 생명을 이어가고 다시 뱀을 잡아 먹습니다. 서울대 학생운동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전두환 정권이 얼마나 센 정권이었어요. 198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식한다고 해서 광화문에 시위를 나갔어요. 시위하다 흩어져 버스에 올라탔는데 30대 직장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나눠요. ‘왜 저렇게 데모 하는 거냐’ 그러자 한 사람이 ‘대통령 직선제 하자고 데모하는 거 아냐’. 사실 그때까지 우리도 대통령 직선제 구호를 내걸지 않았거든요. 사람들은 이미 정치적 의미를 눈치 챈 거죠.
1980년 초반부터 87년까지 많은 학생들이 구속됐던 역사가 대통령을 직접 뽑아야 된다는 민주적인 요구를 상징적으로 담고 있던 투쟁들이었죠. 최전선에서 서울대 학생들이 조직도 하고 과격하게 투쟁도 했죠. 그러다 보니 제일 먼저 탄압을 받고 일종의 대청소 비슷하게 다 제적당하고 구속되다 보니 제일 먼저 궤멸되다시피 한 거죠. 중요한 것은 서울대 학생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 혹은 정치적 자산들이 너무 많이 허비된 거예요. 그러면서 많은 대중적인 학생운동이 확산될 수 있는 뿌리 혹은 기폭제 역할을 한 거죠.
이왕준 : 서울대의 위상이 70년대부터 이어져온 것도 있고 다른 학교로 뻗어나가면서 확산됐기 때문에 공안 당국 입장에서는 운동권의 핵심인 서울대를 잡고 붕괴시켜야 된다고 생각하니까 모든 역량이 관악캠퍼스로 몰릴 수밖에 없었죠.
김종민 : 서울대 학생운동이 이념적 지향이 다른 대학보다 강했습니다. 이념은 깊이 파고들수록 과격해지고 극단적이 될 수 있죠. 사회주의 이론이 강해지면서 정권의 탄압 대상이 된 거죠. 대중적인 학생운동으로 확대해 나가기엔 성격이 안 맞고 이념적 성향이 강했다고 봐요. 그래서 일찍 탄압을 당하고 공격을 당해 대중이 피어날 때, 87년에는 활동가는 많지 않았지요.
고 훈 : 하지만 전술적으로 유연하게 했던 경험도 많이 있었습니다. 86년도 7월인가 한양대에서 13개 대학 연합 집회 열렸을 때 시위를 끝내고 정리하는 집회에서 제가 발표를 했는데, 앞으로 직선제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가 될 거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화두가 하반기부터 재야 정치인, 운동권, 민주화 진영이 직선제 투쟁을 어떻게 갈 것인가로 이어졌지요.
87년 6월 항쟁 후 남주가 구속되고 총학생회 재건운동 할 때 박홍순 선배가 총학 회장 후보로 나왔을 때 서울대 총학생회 유세문에 나온 내용이 ‘민주선거 관리 내각을 통해서 어떻게 정치세력과 연합을 해서 갈 것인가’였어요. 그리고 한두 달 지나 정치권에서 거국중립내각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고. 어떻게 보면 이념지향적인 것도 많았지만 동시에 유연하게 어떻게 하면 전체적으로 힘을 묶어 갈 것인가를 고민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이왕준 : 1980년 민주화 봄 때 서울대생이 앞에 나왔지만 1984년도에 학원자율화 조치되면서 서울대에서 제일 먼저 나가고, 1987년도에도 서울대생들이 진짜 많이 나갔죠. 1986년 막바지에 김재호, 이세진 열사가 분신해 가며 전면적으로 항거를 했고, 이후 조성만 이동수 열사, 앞서는 김태호 열사 등이 몸을 내던지며 저항했지요. 박종철 열사도 고문을 당해 희생당했지만, 독재에 항거해서 목숨을 건 학생들이 가장 많다는 것은 주목해 봐야 합니다.
-1980년대 서울대 학생운동의 의미를 종합해 본다면.
이왕준 : 민주주의 의식과 시민의식, 인권 등 커다란 가치를 같이 공유할 수 있었던 용광로로서 관악캠퍼스가 있었고 그러한 의식이 다른 대학으로 퍼져나가면서 하나의 시대정신을 만들어왔다는 데 큰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앞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민주화의 열망이 6월 항쟁으로 폭발했던 거지요. 우리 사회의 진보적이고 미래적인 가치를 만들어 왔고, 만들어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종민 : 현대사에서 서울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학생운동이 갖는 의미가 단순히 항쟁이나 봉기 등을 통해서 정치변화를 이끌어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학생운동 밑바탕에는 독서서클이 있었죠. 학생 운동 사람들이 보통 독서서클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16년 주입식 교육을 받다 처음으로 각자 스스로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공부를 했던 경험을 갖게 된 거죠. 학교에서 알려주지 않았던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새로운 문화와 의식을 만드는 힘이 생겼죠. 그게 정치적으로는 민주화 운동으로 나타난 거지만. 이왕준 이사장은 ‘청년의사’를 창간해 기존 의사와 다르게 새로운 것을 만들어 냈고 이남주 교수는 학계에서 새로운 시도, 발언을 많이 합니다.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던 문화운동으로서의 학생운동이 대한민국의 큰 변화를 만들어 오고 지금도 주도하고 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어요.
이종일 : 87년 6월 항쟁의 흐름이 지난 촛불항쟁 때 모여졌습니다. 80년대 민주화 세례를 받고 각계각층에서 열심히 살다 헌법가치가 훼손되는 위급한 상황에서 아들딸 데리고 친구들과 다시 광장으로 모인 게 이번 촛불항쟁의 큰 원동력이 됐고 그 부분들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봐야되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세대의 행운인 것 같습니다. 한번 이기는 건 가능한데 두 번이나 승리의 경험을 맛봤잖아요. 그것도 딱 30년 만에.
-마지막으로 모교, 동창회를 위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김종민 : 서울대 폐지론이 주기적으로 나와요. 뭐가 잘못된 걸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서울대는 학비가 싸고 우수한 학생, 훌륭한 교수님이 많죠. 서울대는 국립대로서 역할이 있고 사회적 기대가 크지요. 그래서 서울대가 정말 중요한 일을 많이 하는 학교가 돼야 합니다. 우리 사회 기초가 되는 분야에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거예요. 단순히 출세하는 사람 많이 배출되는 대학이 되면 우리 사회가 서울대를 지원해야 할 명분이 없어요. 개인적으로 출세하는 사람이 많은데 굳이 국가에서 지원해야 하나 이런 논쟁에서 대답할 게 없거든요. 서울대가 아니면 에너지를 쏟기 어렵다 하는 부분에서 역할을 담당해줘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기부하는 사람들도 많아질 겁니다. 서울대 나온 많은 분들이 뭔가 지원을 하고 참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그릇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이종일 : 자연스럽게 동창회 역할로 넘어가는데, 기부를 이끌어 내려면 동창회가 이념적 지형논리를 떠나 마음 열고 40, 50대 동문들에게도 뭔가 해볼 만한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기부도 자연스럽게 이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왕준 : 우리 동문들은 근본적으로 서울대가 본인에게 해준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서울대 간판은 내가 똑똑해서 획득한 거지 학교가 준 게 없다고 생각해요.
이게 서울대를 관통하는 핵심이고 그러다보니 사건사고가 터지면 서울대 출신이 많을 수 있고 또 주류 사회 가면 서울대인이 압도적이죠. 서울대란 공통점이 졸업장에만 존재하고 가치의 공동체성 없이 우리사회를 이끌어온 엘리트 집단의 상징으로만 존재해 왔던 게 70년 역사라 생각합니다.
서울대 폐지론까지 나오는 시점에서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해야 하냐. 저는 이런 점에서 6월 항쟁의 의미를 다시 상기해야 한다고 봅니다. 서울대의 정체성과 우수한 학생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진행·정리=김남주 기자
▽참고기사(제472호) : 6월 항쟁 30주년 기념식 ‘다시 아크로에서’ 개최
http://snua.or.kr/magazine/view.asp?seq=13432&gotopage=1&startpage=1&mgno=&searchWord=&mssq=0200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