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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1호 2017년 6월] 뉴스 기획

참 영웅 윤필효 대위를 추모하며

이근엽 연세대 명예교수

이근엽 연세대 명예교수(사진)가 본지에 6·25전쟁 당시 소속 중대장이었던 윤필효(1931.2.1~1953.7.14) 동문을 기리는 글을 보내왔다. 농학과 1학년에 다니다 참전한 윤 동문은 모교 재학생 6·25 참전 전몰자로 기록돼 1996년 모교 명예졸업증서를 받았다.


나는 1951년 1월에 지원 입대했다. 그 엄동설한에 고된 훈련을 받을 때는 “빨리 총을 달라. 전방에 가 싸워서 북녘 고향으로 가겠다”라고 외쳤다. 사기는 좀 높았던 것 같다. 곧 수도(보병)사단 1연대 1대대 2중대에 배속된 M1 소총수가 됐다.


1952년 가을에 윤필효 중위가 중대장으로 왔다. 나를 가끔 중대장 벙커로 불러 북녘 얘기도 듣고 자신이 경남 함안군 가야면 사람이며 진주농림학교 출신이라는 얘기도 들려줬다(후일 만난 윤 중위의 조카는 윤 중위가 서울대 농대에 진학했으며 1학년 때 갑종간부학교에 입학해 임관했다고 말했다). 이 다정다감했던 중대장이 또 나를 불러 자신이 일주일간 휴가를 다녀왔으며, 함안군 가야면의 초등학교 여교사와 약혼하고 왔다고 말했다. 금년에 휴전이 되면 결혼할 것을 기쁘게 기대한다고도 했다.


1953년 7월 15일의 야간전투는 특히 치열했다. 김화군 원남면 우리 대대진지로 북한군이 총공세를 감행해 왔다. 하늘을 날아가고 날아오는 무수한 포탄의 섬광, 낙하하는 포탄 파편과 돌멩이 소나기, 맹목적인 M1 소총사격, 저 멀리 적의 함성, 참호에 엎드린 채 수류탄 투척, 쓰러지는 전우들….


동틀 무렵에 적은 물러가고 이어 미 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중대장 벙커 내에는 본부요원들과 함께 윤필효 중위도 전사해 있었다. 오른손에 대검을 굳게 쥔 채로…. 추측하건대 벙커에 수류탄을 투척하는 적들에게 카빈 소총으로 저항하다 실탄이 떨어지자 권총으로 대항했고 최후에는 대검으로 저항하다 전사한 것이다. 약혼식을 올리고 1주일 만의 비극이다.


지난해 6월 7일 63년 만에 국립서울현충원으로 윤 중위의 묘소를 찾았다. 관리소에서는 전사자 명단에는 있으나 시신이 없어 묘는 없고 충혼탑 내에 위패가 있다고 했다. 계급장만 한 위패들은 모두 까만 바탕에 이름이 선명하나, 윤 대위(일계급 특진했으리라)의 위패는 색이 바래서 이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난 63년 동안 그의 유족 중 그 누군가가 얼마나 자주 와서 위패를 만지면서 통곡했기에 이 지경이 되었으랴. 현충원 기록에는 전사지 ‘김화, 원남’과 날짜만 나와 있다.


이후에 청량리-동두천-연천-전곡-백마고지를 지나 김화군의 한 오피(OP 작전지휘소)에 올라갔다. 바로 군사분계선 건너편 그 오성산(김일성 고지)의 위용, 그 앞의 사투를 벌였던 삼각고지 능선. 그 때의 초토화된 들과 산악은 초목이 무성해 녹색천지였다. 윤 중위는 이 근처에서 전사했을 것이다. 장렬하게 전사한 윤필효 중위와 전우들의 영령에 경건한 기도를 올리고 이 강산의 평화도 기원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종달새의 애절한 울음은 저들의 영혼을 깨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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