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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9호 2017년 4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First 100 days

성기홍 연합뉴스 정치에디터·본지 논설위원


First 100 days



성기홍(사회86-90) 연합
뉴스 정치에디터·본지 논설위원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33년 3월 4일 취임식을 치른 후 며칠뒤 예정된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준비하며 백악관 집무실에 앉아 창문 너머를 바라다보고 있었다. 마침 백악관 잔디밭에는 취임식 때 설치한 가설물을 철거하는 노동자가 눈에 띄었다. 대공황이 나라경제를 파국으로 몰아넣고, 거리에는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들이 넘쳐나던 국난의 시기였다.


루스벨트는 취임 첫 일주일 은행의 연쇄도산사태와 씨름하며 ‘긴급은행법’을 입법화하는데 골몰하던 와중이었다. 루스벨트는 잔디밭 노동자를 보고 결심했다. “저 노동자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연설을 해야겠다” 곧장 연설담당 비서관에게 연설문 작성 지침을 이같이 내렸다.(조나단 알터의 ‘The Defining Moment’ 내용 중 일부 인용)


이런 과정을 거쳐 3월 12일 밤 역사적인 첫 노변정담(爐邊情談 Fireside Chat) 라디오 연설이 진행됐다. 미국이 대공황의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성패는 루스벨트 취임 후 첫 100일(The first 100 days) 동안 리더십이 좌우했다. 이 기간 노변정담 연설은 지도자의 확신에 찬 노선을 중심으로 미국민을 하나로 묶은 매개였다.
취임 후 ‘첫 100일’이라는 말은 루스벨트 취임 첫달인 3월 9일부터 시작돼 6월 17일 끝난 의회 특별회기가 꼭 100일이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이 100일 동안 루스벨트와 의회는 노선투쟁도 했지만 국난 속에 협치 정신을 잃지 않고 유례없이 많은 경제위기 극복 법안들을 빠른 시일 내에 통과시켰다. 여러 법안들의 내용도 중요했지만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법안 내용 자체보다도 수렁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의회를 비롯, 국가 시스템이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신뢰를 부여한 점이었다.


지도자의 혁신적 정책과 소통, 탁상공론에만 머물지 않은 실행력, 초당적인 협력과 정부에 대한 신뢰 재구축, 신속한 입법화를 통한 정책의 제도화 등이 맞물려 국난 극복의 길을 열었다.


‘노변정담’의 특징은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연설 메시지의 명료함(clarity)이었다. 루스벨트는 3월 12일 연설에서 “여러분의 돈을 침대 밑에 넣어두는 것보다 다시 문을 여는 은행에 맡기는 것이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보증합니다”라고 단순명쾌하게, 또 단호하게 얘기했다. 폐쇄됐다 이튿날 다시 영업을 재개한 은행들 앞에는 대통령의 말을 믿고 돈을 맡기려는 고객들의 줄이 늘어섰다. 루스벨트 모델에 따라 이후 미국 대통령들은 취임 후 첫 100일을 국정 성패를 좌우하는 시기로 보고 모든 에너지를 투여한다.


5월 9일 조기대선이 치러지고 이튿날 새 대통령의 임기가 시작된다. 대한민국도 이번 선거가 치러진 이유를 막론하고도 정치 경제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복합위기를 안고 있는 국난의 시기이다.


대통령제에서 대통령 재임기간은 취임초 정점에 달한 정치적 자산을 갉아 먹어가는 과정이다. 새 지도자가 정치적 자산만 낭비하면서 정쟁에 휘말려 소중한 시간을 허비할 것인지, 소통과 협치를 통해 정책을 입법화하고 정치적 자산을 재구축하며 나라를 바로 세울지는 취임 후 첫 100일이 판가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