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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8호 2017년 3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교수칼럼] "30년을 가르쳐보니...가장 중요한 건 기본입니다"

강태진 모교 재료공학부 교수 : 정든 모교를 떠나며


 

저는 ‘과학적 낙관론자’입니다. 과학지식을 익히며 설득될수록 자연스레 과학의 시선으로 세상을 읽고, 미래를 내다보는 데 친숙해졌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류사에서 우리 세대만큼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적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를 맞춰 태어나 격변과 풍요의 시대를 동시에 경험하며 과학의 세례를 받은 첫 세대, 과학을 선도한 주역으로 살았습니다.


저의 생각과 삶은 관악을 배경으로 펼칠 수 있었습니다. 서울대에 입학하던 해에 서울대 종합화 계획의 청사진이 그려지고 흩어져 있던 캠퍼스가 관악으로 통합되어 관악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관악의 첫인상은 늠름함이었습니다. 훤칠한 바위얼굴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광경에 압도되어 심호흡을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잘생긴 바위 사이사이로 진달래가 필 때 관악은 돌연 활기를 띠었고, 벚나무가 연분홍 꽃구름으로 변하면 마음이 달뜨곤 했습니다. 무턱대고 앞으로 나아가려고만 하던 젊은 날에도 저를 그 자리에 멈춰 서게 하던 그런 봄날이었습니다. 


일찍 알아버린 내 생의 깨달음 하나는 시절의 운을 잘 타고났다는 점입니다. 나의 청소년기는 성장과 번영이라는 국가적 과업을 짊어질 이공계 인재가 절실히 필요한 시대였습니다. 전깃불로 어둠을 밝히고는 있었지만 가전제품이 귀한 대접을 받을 때, 자동차와 비행기 등은 한참 성장하고 있는 소년기에 제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처음 강단에 서서 지금까지 고수해온 일관된 가르침은 ‘과학적 감수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사람은 냉철한 이성과 논리로 이뤄지는 과학을 ‘찬 것’이라 말하곤 합니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호기심과 상상력이 없이는 과학의 세계에 발을 담거나 기웃댈 수 없습니다. 또한 관찰에 매달리는 뜨거운 열정과 인내 없이는 과학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관악이 자랑하는 훌륭한 동료들과의 친분이나 교류는 제게 끊임없는 영감과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학자로서 교육현장에서 우수한 인재를 가르치는 일을 생의 본분이자 즐거움으로 삼아, 학문적 배움과 가르침에는 엄격하려고 했고 제자와 후배에게 애정과 사랑으로 삶과 학문의 진로를 이끌어주는 데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나의 지적 분신입니다. 이렇게 관악의 은덕을 한없이 받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그리고 이 시대는 서울대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세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선, 과감한 변화를 이끌어내서 서울대가 선도적 리더십을 발휘하여 고등교육의 공공성을 확립하고 국가의 미래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해야 합니다. 서울대가 세계가 주목하고 국가와 민족이 바라는 모습으로 크게 비상할 수 있도록 혼신의 힘으로 노력해 주십시오. 둘째, 우리 학생들의 잠재력이 사장되지 않고 최대한 발휘돼 꿈과 희망이 성취될 수 있도록,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책임감이 있는, 인류를 위해 봉사하는 글로벌 인재로 키워내야 합니다. 정의롭고 강인한 인재, 자신의 행복을 넘어 많은 주위 사람의 삶과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선한 인재로 키워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서울대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학문의 전 분야를 보유한 진정한 종합대학입니다. 우수한 개별 분야들을 연계와 소통을 통해 종합대학으로서의 강점을 살리면, 국가의 미래가치를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습니다. 동문이 사랑하는 대학, 국가가 필요로 하는 대학, 세계가 인정하는 대학, 이런 서울대의 미래를 구성원 모두가 함께 만들어 주십시오. 


배움과 가르침은 먼 길을 걷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육의 본질과 수단을 엇바꾸며 기본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충어근본(忠於根本)’, 즉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기본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군자의 즐거움 가운데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즐거움이 으뜸”이라는 맹자의 말대로 저는 관악에서 가르치는 즐거움을 30여 년 동안 누렸습니다. 우수한 청년을 품안으로 모아들여 과학이라는 원대한 학문의 세계로 안내하고, ‘청출어람이 청어람’이라는 말을 품고, 함께 길을 닦는 스승의 길을 생의 본분으로 삼아왔습니다. 더 바랄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고개를 들어 돌아보니 관악의 겨울이 고요합니다. 낯익은 관악의 곳곳에 남아있는 잔설이 침묵으로 화답합니다. 부족한 나를 안아 엄하게 키워줬고 나의 재주와 열정, 탐구심을 쏟아 젊은 관악인을 키우도록 그 품을 열어주었습니다. 내 일생 동안 관악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다음 세대에게 되돌려 주고 의연히 저물어가고 싶습니다.


*지난 2월 28일 교수정년식에서 강태진 교수가 정년교수를 대표해 발표한 인사말을 요약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