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8호 2017년 3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수눌음 다방
최영미 시인
작년 봄부터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페북’을 시작하고 많은 변화가, 혁명과도 같은 변화가 내게 일어났다. 원고 청탁과 강의 의뢰가 많아져 요즘은 살 만하다. 한국은행 제주본부에서 개최하는 한은강좌에 초대받고, 가는 김에 사람을 찾고 싶어 페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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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제주에서 한두 달 산 적이 있어요. 1983년인가 1984년 봄에 제주시 번화가 뒷골목에 ‘수눌음 다방’이라는 클래식 음악다방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이름이 ‘동인다방’으로 바뀌었다는데(동인다방이 수눌음으로 개칭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래 전 일이라…) 제가 거기서 한 달가량 종업원으로 일했습니다. 스물 둘, 세상물정 모르던 시절이었지요.
1981년 학내 시위로 무기정학을 받고 전국을 떠돌았습니다. 돈 떨어지면 지방도시의 제과점이나 카페에서 일하며 여행경비를 조달했지요. 제주에서 방황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와 복학했는데, 주인언니에게 말하지도 않고 급하게 떠나며 비행기 값이 없어 카운터의 돈을 훔쳤습니다. 제가 펴낸 장편소설 ‘청동정원’에서 그 부분을 아래에 인용합니다.
“아침엔 손님이 없어 놀고 먹기였다. 아르바이트 대학생이 없는 오전에만 음료를 나르고, 음악이 끊이지 않게 삼십분마다 레코드판을 갈아주기만 하면 만사 오케이. 구석에 앉아 책을 읽거나 단골손님인 환쟁이들과 문학과 예술을 함부로 논하며 노닥거려도 야단칠 사람이 없었다.
손님이 없으면 대낮에 문을 닫고 다 함께 바닷가로 놀러갔다. 함덕이던가. 모래밭에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르던 여름밤. 내 이십대에 드물게 명랑한 나날들이었다…. 마담에게 그만두겠다 통고하지도 않고, 계산대에서 내가 일한 만큼의 돈을 꺼내 비행기 표를 샀다.
서울로 날아가는 하늘 위에서 나는 예감했다. 이 모든 아픔과 기쁨을 글로 풀어내리라. 맺히고 터진 시간의 매듭들을 문장으로 품을 그날을 그리며, 솜처럼 펼쳐진 구름 위에 붉은 피를 쏟았다. 내가 흘린 피 냄새를 맡으며, 여름이 가기 전에 누군가 내 앞에 나타나기를…나는 빌었다.”
-최영미 소설 ‘청동정원’ 145∼146쪽에서 발췌.
당시엔 제가 그동안(한 달에서 며칠 모자랐어요) 일한 노동의 대가가 몇 만원은 될 터이니, 별로 미안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미안하데요. 그 언니가 제게 아주 잘해주었거든요. 제가 미리 말하지 않고 사라져 갑자기 사람 구하느라 애먹었을 거예요. 주인 언니 만나서, 그때 일 사과하고 돈도 갚고 싶어요.
언니 이름은 잊었고, 나이도 확실히 몰라요. 언니 집이 함덕 근처였던 건 확실해요. 거기서 하루 자며 놀았거든요. 아침상에 나온 물회를 처음 먹어봤는데, 고소하고 상큼했어요. 뭐 이런 음식이 다 있나? 신기했지요. 언니가 저보다 대여섯 살은 많았으니 지금은 어머나, 환갑이 다 되었겠네요. 주인언니에게 제주대학교 연극반 출신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제주대 연극반 이름이 수눌음이라 다방 이름을 그리 정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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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만 하루도 되지 않아, 페북 친구인 백 선생님 덕분에 제주의 언니를 찾았다. 전화기 너머 울리는 목소리는 차분했다. 언니는 내 이름을 모르나, 내가 떠날 때의 상황을 설명하자 나를 기억했다. 제주에서 강의 마치고 저녁에 보자는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해 봄. 제주에서 보낸 한 달이 내 20대의 가장 즐거운 날들이었다. 암울했던 80년대, 내게 빛나는 추억을 선사해준 언니. 얼마나 변했을까. 우리가 서로를 알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