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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6호 2017년 1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닭의 외침

이부영(의학52-59) 한국융연구원 원장 모교 의대 명예교수

새벽을 여는 우렁찬 닭 울음은
어둠을 물리치는 희망의 소리
그 속에서 나를 돌아본다



새해는 닭의 해라고 한다. 그래서 닭에 얽힌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960년대 중반 어느 여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스위스 유학중이었는데 방학을 이용해서 그곳 친구와 함께 그리스 여행을 간 일이 있다. 이태리 남단의 항구도시, 부린디지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한 나절 가로질러 저녁에 닿은 부두는 바울이 전교하던 그리스 땅, 고린도였다. 갑판으로 나오니 부둣가의 나지막한 집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덥고 무거운 공기와 함께 흙냄새와 생선냄새가 얼굴에 훅 와 닿았다. 순간, 나는 50년 전 시간으로 되돌아간 느낌을 받았다. 마치 째지게 가난했던 조국에 돌아온 것 같은-. 그날 밤 아주 소박한 작은 호텔에서 잤는데 새벽에 먼데서 닭이 울었다. 아, 그 소리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닭은 보통 새벽을 알리는 새로 알려져 있다. 어둠이 가고 동녘하늘에서 해가 떠오를 것임을 세례자 요한처럼 큰 소리로 고하는 자이다. 모든 악이 닭울음에 놀라 도망간다. 닭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닭이 그 출현을 알리는 태양의 빛이 무섭기 때문이다.
도심지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도 누가 닭을 기르는지 우리 동네에서도 닭 울음소리가 자주 들리곤 했다. 그 소리를 들을 때 마다 나는 어느 한가한 시골에 와있는 느낌이 들곤 했다. 흥분하여 낯을 붉힌 수탉이 머리를 홰홰 굴리다가 작심한 듯 날개를 몇 번 퍼덕이고는 목을 길게 뽑고 하늘에 대고 꼬끼오! 힘차게 외치는, 매우 진지하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약간 우스꽝스러운 수탉의 몸짓이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동네의 닭은 아침에도 울고 낮에도 무시로 울어대서 신용을 잃었는데 그나마 더 이상 울지 않은지 오래다. 하기사 인간이 닭을 두고 새벽을 고하는 동물이라고 치켜세웠지 닭이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은 아니다.
닭은 새과에 속하지만 잘 날지 못한다. 그래서 대지에 매여서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비극적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민담 ‘선녀와 나무꾼’의 어떤 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하늘로 날아간 선녀 아내를 우여곡절 끝에 만나서 잘 살던 나무꾼이 지상의 어머니가 그리워 잠시 다녀오려 할 때 선녀는 천마(天馬)를 내어주면서 절대로 말에서 내려 땅을 밟으면 안 된다는 주의를 준다. 지상에 온 나무꾼을 본 어머니는 호박죽이라도 먹고 가라고 말 위의 아들에게 죽을 건네주었고 나무꾼은 그것을 먹다가 뜨거운 죽을 천마의 등에 떨어뜨려 말이 놀라는 바람에 나무꾼은 땅에 떨어지고 영영 하늘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무꾼은 하늘을 향해 울다가 결국 한 마리 닭이 되었다고 한다.
이점에 관련해서 중국인은 아주 실질적이고 냉철하다. 주역의 괘, 중부(中孚), 효사 상구(上九)에 이르기를 “하늘에 다다르고자 하는 닭의 울음. 고집하면 흉(凶)이다.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겠는가?” 중국학자 빌헬름의 해설에 따르면 “닭은 하늘로 날아가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다만 소리만 지를 뿐이다. 그 표현이 감정보다 강하기 때문에 이것은 과장이다. 그래서 그릇된 비애(悲哀·pathos)가 된다. 내면의 진실과 합치되지 않기 때문에 오래가면 흉하다.”
이 이야기는 한국인의 모성콤플렉스, 즉 대지적인 것, 모성성과의 끈끈한 구속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몸짓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혈연, 지연, 학연 이 모든 모성적 세력과의 유대에서 벗어나 공과 사를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는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돼왔다. 그러나 그 때마다 주역의 닭처럼 이상주의자들의 빈 메아리, 실속 없는 구호에 그쳤다. 왜냐하면 대지(大地)와의 유대는 곧 태모(太母)원형, 친족 리비도로 맺어진 관계이므로 쉽게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니 그럴수록 닭은 계속 외쳐야 한다. 새벽을 알릴 뿐 아니라 다가오는 위험을 알리는 경고의 소리를 계속 울려야 한다. 사실 지나간 역사 속에서 우리는 숱한 대형사고를 통해 닭의 경고음을 되풀이해 들어왔을 터이다. 그런데 무엇이 달라졌는가? 사람들은 여전히 문제의 핵심을 보지 않고 ‘죄’를 뒤집어쓸 속죄양을 밖에서 찾는 데 바쁘다.
60년 전 째지게 가난했던 대한민국은 이제 경제대국으로 선진국과 어께를 나란히 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때 내가 본 고린도의 가난한 부두는 이제 여기에 없다. 그와 함께 시골 뜨락의 한가한 닭 울음소리도 그쳤다. 그 대신 무시무시한 크기의 대형수용소 같은 ‘공장’에서 닭은 A4 용지 한 장의 공간에서 사육되고 산란되며 처리되어 예쁜 모습으로 식당과 집안 식탁에 오르고 있다. 그리하여 지난해 저 ‘200만’의 촛불이 모였다고 하던 광장에서 군중들이 분노와 증오와 야유의 바람을 일으키고 지나갈 때 밤도둑처럼 철새가 떨어뜨린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가 닭을 휩쓸었고 지금까지 2,600만 마리 넘어 닭과 오리를 도살하는 참사가 벌어지고 있다. 대량생산과 집단주의를 2,600만의 닭과 오리가 죽어가면서 경고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그 경고의 의미를 눈치챈 사람이 없다.
우리는 지난해 촛불시위현상을 통하여 집단의 힘이 -최소한 정치인들에게- 얼마나 강한 영향력을 주는지 보았다. 집단은 또 하나의 어머니이다. 어머니 품 속에서 개인은 어린이가 된다. 착한 어린이도 되지만 못된 어린이로 변할 수도 있다. 개인은 집단적 견해와 감흥에 동일시하고 개인적 비판의식은 약해진다. 남의 사악함을 규탄하면서 권력과 금력의 시녀가 된 자신의 무의식의 그림자를 못 보는 상태가 된다. 그러니 세상을 바꾸는 문제의 핵심은 개인의 마음이다. 개인 개인의 반성과 자각 없이 사회의 개혁은 기대할 수 없다.
새해의 벽두에서 나는 아직도 어둠을 물리치는 한 마리 닭의 외침이 그립다. 그리고 사람들이 닭의 경고음을 자신의 마음속에서 듣고 촛불을 들어 자기 마음의 어둠을 비추기를 희망한다. 남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보고 각자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할 때, 그만큼 나라의 미래는 밝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