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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5호 2016년 12월] 기고 에세이

녹두거리에서: 나를 키운 8할은 대학시절 토론문화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나를 키운 8할은 대학시절 토론문화

강원국(외교83-90)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대통령의 글쓰기’ 저자



학교 다니는 4년 동안 낮에는 ‘강 건너’에 가서 막걸리를 마셨다. ‘강 건너’는 수업 ‘땡땡이’ 치고 찾아가는 관악산 입구 포장마차 촌으로, 개구멍을 통해 학교에서 곧바로 갈 수 있었다. 저녁에는 ‘신사리’(신림동 4거리)로 진출했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술만 마시지 않았다. 친구들과 대화하고 논쟁했다. 친구들은 수준이 높았다. 아는 게 없어 한마디도 못하는 날이 많았다. 집에 가는 길에 자괴감이 들었다. 술기운에 다음날 할 말을 준비했다. 그리고 다음날 공부한 내용으로 대화를 유인했다. 이렇게 하루하루 토론하며 살았다. 그 힘으로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글을 8년간 쓸 수 있었다.


1990년 대우증권에 입사했다. 그해가 회사 창립 20주년이어서 사사 만드는 업무가 맡겨졌다. 사사를 집필하는 언론사 퇴역 논설위원의 수발을 드는 게 내 임무였다. 그런데 그가 다른 회사 사사를 베껴주는 것 아닌가. 회사에 신고하고 계약금을 돌려받아왔다. 아뿔싸. 사사를 쓸 사람이 없으니 나보고 쓰란다. 개발새발 썼다. 그 인연으로 김우중 회장이 전경련 수장이 됐을 때 회장비서실에 가게 됐고, 그 경력을 인정받아 청와대에 들어갔다. 운도 좋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필기시험을 쳤으면 대우증권에 들어가지 못했다. 서울대를 나왔기 때문에 면접만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회장비서실에 불려가는 데도 서울대 출신이란 점이 작용했다. 나를 부른 상사가 동문 선배였기 때문이다. 서울대 나온 덕분에 잘 살았다.


나라가 혼돈 속에 있다. 국민이 ‘멘붕’ 상태다. 미증유의 사태를 겪으며 두 가지 생각이 났다. 그 하나는 리더 자질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회주의 문제다. 서두에 두 가지 기억을 떠올린 것도 이 때문이다.


‘최순실 게이트’는 대통령이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쓸 수 없어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사실이 밝혀지면서 시작됐다. 다른 건 차치하고 이것 한 가지 만으로도 대통령 책임은 무겁다. 대통령 권력을 국민이 선택하지 않은 누군가에게 양도한 것이기 때문이다. 리더는 자신의 생각이 있어야 하고, 그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의 구조화와 언어화 능력은 리더의 필수 요건이다. 그래야 소통할 수 있다. 토론과 논쟁이 가능하다. 자신의 연설문을 스스로 쓸 수 있다. 대통령은 이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생각조차 없었다. 이것이 이 불행한 사태의 본질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는 자신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일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똑똑히 알았다. 리더는 글을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리더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남이 써준 것을 읽으려면 적어도 눈치라도 볼 것이다. 나아가 스스로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 국민의 글쓰기 역량이 높아질 것이다. 더 깊이 생각하는 국민이 될 것이다. 우리 국민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한 뼘 더 성장하고 한층 더 성숙했기 때문이다. 슬픈 애기지만, 이것이 최순실과 대통령이 우리 국민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다. 


두 번째 선물은 더 슬프다. 우리 국민에게 사회 지도층의 기회주의적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는 점이다. 이번 사태에서 확인한 청와대 비서진을 비롯한 대통령 주변의 행태는 어떤가. 과연 몰랐을까. 알지도 보지도 못했다면 그들은 무엇을 하며 살았단 말인가.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아는 체 하면 자리보전 못할까봐 모른 체 하고 산 것은 아닐까. 국민과 나라 걱정보다는 자기 자리 하나 지키는 게 더 중요하지는 않았을까. 어찌하여 궁지에 몰린 대통령과 함께 하겠다는 참모 한 사람 찾아보기 어려운가. 무엇보다, 나는 이런 사람과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