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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호 2005년 1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서예가 南田 元仲植동문

서당 열어 어린이 한자교육 나서
 한글전용화가 대세를 이루면서 한자가 설 곳을 잃고 있다. 국어의 한 축을 이뤄온 한자를 터부시하면서 생각을 표현하는 어휘들이 도태되고 저속한 조어와 외래어가 그것을 대체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언어의 저질화는 정신의 황폐화를 가속화한다'는 것이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서예교육을 강화시키는 것. 서예가 南田 元仲植(68년 農大卒)동문이 그 작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강원도 고성군 그의 집에 서당을 마련, 5~6세 어린이에게 서예를 가르칠 계획이다.
 元동문은 "한자를 대체할 수 있는 한글이 보급되기도 전에 한글전용화가 급하게 진행돼 오히려 국어가 죽어가고 사고의 깊이가 얕아지고 있다"며 서당을 열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붓으로 한자를 배우면 이해가 빠르다. 5~6세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것은 이 시기에 기본지식을 가장 빨리 흡수할 수 있고 그 배움이 평생을 가기 때문이다. 서예의 교본으로 쓰일 소학, 명심보감 등의 고전을 통해 인간의 도리를 가르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또 畵에도 쉽게 입문할 수 있다. 한자는 일종의 그림이기 때문이다.  元동문은 劍如 柳熙綱선생의 수제자로 국내 서단을 이끌고 있는 중추 서예인이다. 농학과 재학시절 劍如에게 사사 후 네 차례 국전에 입선하고 대한민국예술대전, 동아미술제, 한국서법대전 등의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다.  서단에서 그는 서예가의 표본으로 통한다. 그의 인간적인 성품 때문이다.  대학 4학년 때 劍如선생이 중풍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졸업 후 스승을 돌볼 여유가 있는 직장을 찾았다. 그리고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8년간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 8년 기간동안 劍如선생이 좌수서로 다시 붓을 들 수 있었던 데에는 元동문의 보살핌이 있었다.    배움의 자세도 치열했다. 書法은 익혔지만 정작 중요한 `글'은 모른다는 자괴감이 늘 따라다녔다. `도연명이 낙향해 귀거래사를 썼던 마흔 셋의 나이에 나도 떠나리라.' 그러나 밥벌이를 쉽게 놓을 수 없었다. 계획했던 시간이 한 해 두 해 흘러 나이 오십이 되었을 때 비로소 세속의 끄나풀을 풀 수 있었다. 강원도 인제의 미산 자락으로 홀로 들어가 10년 동안 글공부에 매진했다.  지난 2000년 느지막이 가진 첫 개인전. 殷나라와 周나라의 甲骨, 鐘鼎문자와 춘추 전국시대의 고문과 주문 그리고 진, 한, 전, 예, 팔분을 두루 섭렵해 자기만의 서체를 일구었다는 평을 받았다. 특히 감색 종이에 금분으로 쓴 채색서 `사경연화경잔권(寫經連華經殘卷)'은 조형성이 뛰어나 서예를 현대예술로 재생시켰다는 찬사를 받았다.  元동문은 현재 3월 개강을 앞두고 집에 마련한 서당, 전시실, 아이들이 묵을 방을 꼼꼼히 점검하고 있다. "우선 서울 서실 제자들의 아이들 가운데 5명 정도를 2년간 데리고 살면서 가르칠 생각입니다. 기회가 되면 인근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에게도 매주 토요일 서예를 가르치고 싶고요. 스승을 따라가기에는 부족한 게 많지만 스승의 뜻이라도 널리 알려야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