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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호 2005년 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李御寧 초대 문화부 장관


대담 : 본보 朴聖姬논설위원(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2005년 乙酉年 닭띠 해 새 아침이 밝았다. 최근 동북아에서 우리 나라의 역할이 날로 강조되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 나라의 문화 코드가 세계 각국에 전달돼 큰 파급을 일으키고 있다. 따라서 닭띠 동문 중 한 분으로서 1956년 모교 문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며 우리 나라의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중앙일보 李御寧고문에게 이런 한국을 포함한 주변국의 국제 정세, 또 새로운 문화 코드인 한류 등에 대한 올해 전망을 들어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한류' 지속성으로 승화시켜야할 과제 남아
대중문화 양성 위한 아카데미즘 부활해야

 - 안녕하세요. 여전히 건강해 보이십니다. 올해가 을유년 닭띠 해인데요.
  선생님께서도 닭띠시지요. 닭띠 해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나요.

  
   띠는 재미있어요. 닭띠다 하면 닭과의 아이덴티티가 생기거든요. 닭엔 다섯 가지 특성
   이 있어요. 벼슬로 대표되는 문(文), 시간을 잘 알려주는 신(信), 날카로운 발톱에서 보
   여지는 무(武), 적을 맞아 물러서지 않는 용(勇), 새끼들에게 모이를 찾아 먹이는
   인(仁)까지. 사람도 이 다섯 가지를 지니면 되는 거지요. 나는 닭을 많이 의식하며 살
   았어요. 해보다 먼저 일어나 우는 닭처럼 늘 남보다 앞서 개척하며 살았어요. IT산업
   초기에 `산업은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 가자'는 구호도 만들고. 안해본 분야도 없어.
   영화, 문학, 불문학, 기호학까지.
   또 닭이 먹이를 먹으려면 요란하게 파헤치는 것처럼 열심히 파헤쳤지요. 젊었을 때는
   논쟁도 많이 하고. 지금 젊은 사람들은 손해나는 일은 안하려 논쟁도 안하지만. 7천만
   명이 각자 동물 하나씩 가지고 사는 것은 오늘날처럼 자연을 잃고 인공적인 삶을 사는
   상황에선 아주 즐거운 일이에요. 외로운 인간에게 이런 전통은 즐거운 것이고, 한중일
   을 묶는 가장 큰 문화 코드로 작용하기도 해요.

 - 닭띠 해를 맞아 후배들에게 주실 메시지는.

  닭은 두 가지 점에서 교훈을 줘요. 닭은 때를 안다는 게 첫째지요. 무엇보다 젊은 사
  람들이 국제감각과 문명의 미래를 알았으면 해요. 새벽인지 밤인지 대낮인지 분간하
  는 닭의 슬기를 배워야지요. 세계가 지금 몇 시인지 모르면서 어떻게 국제사회에 참여
  할 수 있겠어요.
  둘째는 조류인데도 날지 못하는 닭처럼 살지 말고 체중을 좀 줄이고 길들여진 것에서
  벗어나 야생의 새처럼 비상하는 연습을 했으면 해요. 때를 알고 길들여진 고정관념에
  서 벗어나 힘차게 날아보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고 싶어요.

  - 일본의 한류붐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일본의 욘사마 붐은 도대체 어디에
   서 연유된 것인가요.
 
   지금까지의 대중문화는 주로 10대들의 문화였지요. 할리우드도 그렇고 일본도 마찬
   가지고. 실리콘밸리와 할리우드의 합성어인 실리우드로 대표되는 디지털기술에 의
   한 대형 폭력물이나 자극적인 것들이 주류를 이뤘고 그러다 보니 건조하고 육체적인
   데다 탈전통, 탈문화적인 현상이 지배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첫사랑의 순정을 연상시
   키는 아름답고 동화같은 깨끗한 사랑 이야기가 등장하자 30대나 40대, 50대 주부들
   사이에 그동안 묻혀 있던 큰 덩어리, 순수한 무엇인가를 찾던 갈망이 터진 것이지요.
   휴화산이 폭발했다고나 할까.
   물론 여기엔 NHK라는 전국적 미디어의 역할이 절대적이었어요. NHK는 일본의 사회
   트렌드를 바꾸고 현대의 신화를 만들어요. 우리는 TV드라마가 인기 있어도 그걸로
   끝나지만 일본에선 TV드라마가 기폭점이 돼 국가 전체의 커다란 흐름을 바꿔요.
   NHK가 `신생구미'를 방송하면 교토의 상권이 바뀌고 판매량이 달라지고,
   `실크 로드'를 내보내면 젊은이들 죄다 실크로드로 여행을 갑니다. `겨울 연가' 붐도
   그 일환이에요.
   일본을 움직이는 건 NHK와 통신회사인 NTT, 컴퓨터회사인 NEC 등 3N인데 NHK는
   특히 안방의 주부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지요.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일본
   드라마와 다른 `겨울 연가'를 방송한 것이 사회 변화에 움직이지 않고 섬처럼 떠있던
   주부들의 감성과 본능을 자극, 휴화산을 활화산처럼 만든 것이지요. 따라서 이건 베
   트남,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볼 수 있던 한류와는 달라요. 그곳의 한류는 서방문화를
   접할 수 없었던 폐쇄주의 사회가 한국사회의 자유로우면서도 개방주의적인 사회를
   보면서 느낀 경외지만 이건 그게 아니거든요.

  - 전국 방송이고 시청률이 높다고 해서 꼭 그런 붐이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공중파방송의 시청률은 우리가 훨씬 높지만 그렇다고 드라마 촬영지를 찾아
   바다를 건너거나 하지는 않으니까요.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
   가요.

  `오마쓰리' 즉 축제문화라고 할 수 있어요. 일본사람들은 누군가 오미코시를 매고
   흔드는 것을 보면 최면에 걸려요. 거기에 휩쓸리면 `나'라는 것이 없어져요. 집단 속에
   완전히 매몰되는 거지요. 때문에 어떤 붐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 없어요. 그 밑에 있는
   감상주의가 집단 히스테리처럼 나타나면 군국주의가 되고. 일본사람들은 또 픽션과
   사실을 혼동해요. 그러니까 아직 천황제가 유지되는 것이고.
   또 내가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얘기한 것처럼 일본에선 뭐든 일본화해서 받아들여
   요. `겨울 연가'를 `후유노(겨울의) 소나타'라고 바꾼 것도 그렇지요. 메들리를 뜻하는
   연가를 소나타로 단순화하고 후유노 소나타도 복잡하다고 `후유 쏘나'라고 하니까요.
   배용준도 욘사마로 줄이고. 이렇게 일본사람은 작은 한 점에 모든 정신을 집중해 모든
   사람이 분위기에 맞춰 호흡을 맞춰요. 욘사마에 대한 관심이나 열정도 그런 것이지요.
   `겨울 연가'의 경우엔 또 여러 가지가 맞아 떨어졌어요. 더빙도 잘했고. 스토리나 연기
   력은 물론 음악이나 영상도 참 아름다운데 그건 프로듀서의 힘이지요. 드러난 건 배용
   준이지만 실은 연출자가 일본에 없는 일본적 감성을 만든 거예요. 공과대학생을 많이
   길러놓자 건설 붐이 일어난 것처럼, 드라마도 많이 만들다보니 효도한 것이지요. 역사
   란 언제나 우연의 연속인데 우리의 약점이던 저질 텔레비전극이 그동안 이렇게 발전해
   수준 높은 것이 됐고 그게 일본에서도 설득력을 얻은 셈이지요.

  - 그래도 한국 남자들은 일본 여성들이 촬영지를 찾아 한국까지 오고,
   배용준을 보기 위해 공항에 몰려드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고 하는데요.


   일본 주부들은 평소 자전거를 타고 장보러 다니면서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요.
   일생동안 참고 자기 인생은 남편이 정년퇴직한 황혼에 가서야 찾겠다고 생각하던 중
   년여성들에게 `겨울 연가'가 잃었던 여성성을 일깨운 거예요. 신데렐라가 마법의 힘으
   로 가상의 마차와 옷을 입고 왕자의 파티에 간 것처럼 청춘을 잃은 사람들이 영상이라
   는 가상현실 속에서 16세 소녀가 돼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면서 잊었던 여성성과 사랑
   을 찾은 거지요.
   일본 남편들도 처음엔 뭐라고 했는데 상대가 이웃집 남자도 일본사람도 아닌 한국의
   영상속 주인공인데다 잔뜩 퍼져서 여성적 매력이 없던 아내가 신혼 때처럼 부드럽고
   생기나고 삶에 반짝이는 얼굴을 하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도와준다고 해요.

  - 한류바람으로 일본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크게 달라졌다는데요.
   한국인과 한국상품에 대한 호감도도 높아지고요. `욘사마'만 붙으면 뭐든 잘
   팔린다고도 하고요.

   10대들은 구매력이 없는데 비해 주부들은 구매력이 높으니 광고가 되고 장사가 잘돼
   CF, 출판, 액세서리 등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니까 붐이 더 확산됐지요. 10년 불황
   끝에 터지는 바람에 손해본 사람이 없어요. 얼었던 일본의 소비문화도 녹고. 게다가
   일본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바뀌었대요. 전엔 MK택시 운전사들이 일본인 행
   세를 했는데 요즘엔 묻지 않아도 한국사람이라고 밝히고, 관광객들도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대우가 달라진다잖아요. 이런 일은 몇 사단의 군대로 타민족을 정복하거나 몇 조
   원으로 시장을 점령해도 불가능한 거지요. 5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것으로 문화
   의 힘, 대중의 힘을 보여준 거예요. 여성 파워가 강해진 것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하고
   요.

  - 중요한 건 이런 한류가 일시적인 것이 되지 않고 계속되도록 하는 걸 텐데요.
   어떤 방안이 있을는지요.

   환상의 마차가 호박이 되지 않도록 해야지요. 일본 여성들이 배용준 버블이 꺼진 뒤
   자기는 여전히 나이 많은 애 엄마이고 첫사랑과 욘사마 같은 백기사는 없다 싶으면
   실망해서 역풍 일으킬 수 있어요. 누구나 자신이 믿었던 것이 허구 내지 환상이 되는
   게 싫어 `꿈이라면 깨지 말아다오' 하는 거지요. 그런 환상이 죽을 때까지 깨지 않도록
   하는 게 문화의 지속성이고 영속성이고요.
   문화는 리얼리즘을 초월하는 상상의 세계이고 현실에선 이뤄질 수 없는 것을 언어와
   영상에 의해 대리만족시켜주는 거예요. 보이지 않는 실로 만든 옷과 같은 거지요.
   오늘날엔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끝없이 가짜의 꿈을 만들어준 다음 깨버리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신화들이 있어요. 마르크스는 어째서 전기가 생겼는데
   벼락신 제우스가 살고 있는지 궁금해 했다잖아요. 현실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신화를 만들어 주는 게 진짜문화에요. 한류를 흘러가는 물이 아니라 신화처럼 변하지
   않는 것으로 승화시키냐 못 시키냐가 가장 큰 과제지요.


다양성 확보/선택 가능한 교육제도로 전환
12띠 문화가 한/중/일 묶는 연계점 될 것

  - 그 과제를 실현시킬 방법으론 어떤 것이 있을까요.

   고급문화는 대중문화를 끌어올리는 하나의 원천이에요.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관계
   와 같지요. 응용과학은 과학의 힘을 실감하게 하지만 그건 일상생활과 관계없는 기초
   과학으로 이뤄져요. 마찬가지로 고급문화는 대중적인 힘도 없고 소수자의 것이지만
   그것이 상상의 물을 대주는 풀이 돼요. 우리는 대중문화로 나타난 과일만 따려고 하
   지 그 뿌리나 토양의 비료 같은 인프라엔 관심 없어요. 그러나 고급문화 없이 대중 문
   화만 발달할 수는 없어요. 시집이 몇 만 부씩 팔리는 풍토가 `가을동화' `겨울 연가'를
   만드는 정서의 바탕이에요.

  - 인문학의 중요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스쿨'의 어원은 `한가하다'라는 거예요. 히랍어로 `한가한' `레저' 등을 뜻하니까요.
   노동을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노동만으로 이뤄진 삶에선 명예나 비전을 가질
   수 없다는 거지요. 의식주가 노예 상태를 만든다는 겁니다.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면
   서 실은 전 국민이 의식주에 얽매이는 노동자로의 귀의가 이뤄졌어요. 자유의지를 가
   지고 창조적으로 일하는 게 없으면 도심은 정글이 돼요. 대학이 `한가한'과 동의어로
   쓰인 건 의식주에서 벗어난, 노예가 아닌 사람이 그 속에서 뭔가 했다는 걸 의미해요.
   인문학이 시장화된다는 건 전 국민이 의식주의 수단과 도구로 전락한다는 걸 뜻하는
   거예요. 인문학이 살아야 고급문화의 바탕이 생성되고 고급문화가 있어야 우수한 대
   중문화도 만들어질 수 있어요.

  - 2002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를 계기로 국내에서 눈에 띄게 달라진 변화가
   있다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이어서 뭉치지 않아요. 지금은 자기 조직화에 능해졌
   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저절로 조직화되는 거지요. 싸이월드를 통해 남이 뭘 하는지
   알고 서로 관련을 맺는 것처럼 가족과 친척 밖에 모르던 사람들 사이에 월드컵 이후
   타자와 공생하는 사회성이 생겨났어요. 집단이익 중심의 패거리를 만드는 부정적 대
   목도 있지만. 지금이 분수령인데 어느 쪽으로 가느냐는 정치의 몫이에요. 정치는 논
   리가 아니라 균형이고 그때그때 분위기와 권력을 분배하는 거예요. 정치 연설을 들어
   보면 알지만 똑똑하게 논리적으로 얘기한다고 박수치지 않아요. 가려운데 긁어주고
   분위기 알아주고 욕망을 찾아주고 해야 박수치지요.
   정치가는 공을 띄워줘야지 자기가 스트라이커 노릇을 하려 하면 안돼요. 정치가가 토
   싱하면 기업가나 배용준 같은 사람이 스트라이크를 때리는 거지요. 온 국민이 스트라
   이커가 되도록 정치가들은 토싱만 해줘야지요. 우리는 정치가가 스트라이커 하려다
   네트에 걸려요. 스타 소리를 못 들어도 토싱을 잘 해야 좋은 정치가에요.

  - 우리 나라의 당면과제인 통일 문제 해결을 위해선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세상에 통일하지 말자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있다면 정신병자지요. 그런데도 통일
   지향적인 사람과 반통일주의자로 지탄받는 사람으로 나뉘는 건 방법상 차이 때문이겠
   지요. 통일하지 말자는 사람이 있다면 죽기 살기로 싸울 수 있지만 방법이 다른 건 얼
   마든지 대화할 수 있다고 봐요. 방법 문제가 본질 문제로 착각돼 공론의 장이 막히는
   게 비극적인 거지요. 통일론은 누구나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해요. 산골사람이
   서울에 와서 텅빈 버스 놔두고 만원 버스를 타려 애쓴다고 `서울사람은 바보'라고 한다
   는 농담을 생각해 봐야지요. 통일 역시 올바른 방향이 뭔지 깊게 생각하고 비전과 통
   일된 국가의 위상이 무엇이냐를 함께 토론해야지요. 길이 없으면 만들고 두 개 밖에
   없는게 싫으면 새 길을 찾아야지요.

  - 대학 문제로 넘어가지요. 서울대의 경우 갈수록 배제 혹은 지탄의 대상이 되
   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최근엔 세계 대학 순위가 낮다, 취업률이
   낮다는 점까지 거론하면서 서울대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려는 움직임까지 있
   는데요.

   한마디로 반달리즘 즉 반 지성주의에요. 요즘 대학을 상아탑이라고 하면 시대착오자
   로 쫓겨나겠지요. 그러면 상아탑이 쓰레기터 또는 단순한 직업양성소냐 물으면 그렇
   다고 할 사람도 없어요. 상아탑도 쓰레기터도 아닌 어중간한 지점에 대학이 있는데
   서울대가 유독 지탄의 대상이 되는 건 반달리즘이 하나의 바람으로 불고 있기 때문이
   에요. 서울대가 특권층이고 모든 서울대 출신이 사회 곳곳을 차지하고 있어 많은 사
   람들이 소외되고 차별화가 생기고 국민들간에 위화감도 생기는 것처럼 얘기하는 데
   실은 엘리트주의는 좋은 의미의 대중주의에요. 실리콘밸리를 보면 천재 한 명이 수백
   만, 수천만명을 먹여 살리잖아요. 엘리트주의는 혼자 이익을 취하거나 만족하는 게 아
   니에요. 엘리트들은 대중을 활력화하고 끌어올리는 역할을 해요. 뱀 머리가 물을 건너
   야 꼬리도 건너지 꼬리하고 머리가 싸워 뱅뱅 돌면 강을 건너지 못해요.

  - 그런데도 지금 우리 사회에선 서울대 죽이기가 진행중이잖아요.

   평준화는 곧 무지를 공유하는게 아니지요. 우수한 사람이 나올 수 있는 상징적인 대학
   이 없는 나라는 없어요. 엘리트주의가 나라를 망친다고 얘기하는 건 나라 전체를 심볼
   도 엘리트도 없는 곳으로 만들자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대중도 죽어요. 영국의 케임브
   리지나 옥스퍼드에 가보면 교실이고 채플실이고 세미나 실이고 온통 책에서 본 사람들
   의 초상이 걸려 있어요. 과학자 문인 할 것 없이. 동창들이니까. 이순신 장군은 다른 사
   람들에겐 역사 속 인물이지만 내겐 동네사람이에요. 아산군의 이순신 사당이 있는 곳
   10리 밖에서 살았거든요. 이순신 장군을 동네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과 역사의 인물로
   생각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에요.
   산맥이 높아야 산이 높아지지 평지에선 산이 높아질 수 없어요. 산맥에서 자기가 조금
   노력해 에베레스트산이 되는 거지, 황야에선 에베레스트 산이 나올 수 없어요. 서울대
   도 민족의 역사가 만들어준 산맥이지 몇몇 사람들이 엘리트주의를 표방하고 기회를 빼
   앗아 만든 그런 대학이 아니에요. 입학자격이 평등하게 주어진 이상 평등한 대학이지
   엘리트 대학이 아니잖아요. 어떤 지역에서 많이 들어오면 다른 지역을 그 수준으로 끌
   어올려야지 그 지역을 없애 모든 것을 낮추면 어떻게 되겠어요. 또 서울대 졸업생이 섹
   트 의식이 있었다면 그런 욕을 먹어도 되겠지만 어느 직장에서도 서울대 동창끼리 뭉쳐
   인해장벽을 쌓거나 파벌을 만드는 일은 드물어요. 서울대 출신이 각계에 많이 진출했다
   는 것과 그 사람들이 조직화돼 섹트주의를 만들었다는 건 다른 얘기에요. 따라서 오늘
   날 사회 곳곳에 서울대 출신이 많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울대 폐지론까지 나오는 정서
   는 정말 잘못된 일이지요.

  - 터무니없는 일인데도 현실적으로 그런 움직임이 있잖아요.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가라앉히자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요.

   사랑 받는 엘리트가 돼야지요. 서울대 출신들이 자신의 지적인 능력, 학력, 교양을 많
   은 사람을 위해 써야지요. 서울대 출신이라는 학벌로 좋은 곳에 취직하고 자신만의 울
   타리를 만들면, 아까 말한 것처럼 의식주의 노예로 전락하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옛날
   희랍의 시민은 책임감과 의무, 책임, 명예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어요. 서울대 졸업 역시
   명품 브랜드같은 간판이 아니라 사회에 보다 많이 이바지하는 길로 여겨져야지요.
   서울대가 지탄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너무 일찍부터 입시 경쟁이 시작되는 거예요. 한
   국의 풍토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어요. 일본만 해도 우리처럼 꼭 한 군데 대학에
   만 가려 하지 않아요. 다른 대학도 서울대를 탓하지 말고 특성화해야 하고요. 서울대가
   베스트 원이라면 다른 대학에선 온리 원을 추구해야지요. 대학마다 특성화하는 것이야
   말로 입학시험 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어요. 서울대 출신이라 학벌이 인정되고 다른 대
   학은 안되는 획일적 가치평가의 사회를 다양한 평가사회로 만들어야 해요.

  - 교육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얘기하면서 본고사 부활에 대해선 부정적인데요.
   내신을 강화하겠다고만 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개방과 경쟁을 나쁘게 생각하는 게 문제에요. 그렇지만 남대문시장에 가보면 경쟁자끼
   리 형님 동생하면서 같이 장사하잖아요. 실은 그 사람들이 경쟁 원리를 더 잘 아는 거예
   요. 좌판이 몰려 있어 손님이 오는 거니까요. 경쟁과 협력을 합쳐 코피티션이라고 하잖
   아요. 교육에서도 경쟁을 없애고 평준화한다는 건 개념 자체가 틀린데다 현실 불가능한
   거예요. 닭도 닭장에 넣으면 서열이 생겨요. 문제는 경쟁을 어떻게 협력관계로 만들 것
   이냐 하는 거지요. 모두 90점 맞으면 다 70점 맞는 거나 똑같아요.
   교육의 다양화, 학과의 다양화로 바꿔야 학력사회를 능력사회로 바꿀 수 있어요. 대학
   만이라도 선생님이나 부모가 아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게 가장 큰 교
   육이이요. 고등학교 1학년 때 다양한 학문에 대해 알려주고 세상이 얼마나 넓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들려줌으로써 좋아하는 게 뭔지 깨닫게 해주는 게 교육이에요.

  - 영인문학관을 설립하셨는데요. 소장품은 어느 정도인지,
   또 개인이 운영하긴 어려우실텐데 어떻게 하고 계신지.
 
   미술품부터 육필목록까지 한국의 문학관 가운데는 소장품이 가장 많은 수준이에요.
   심리학자의 조사에 따르면 큰 박물관보다 작은 박물관 관람객이 진열품을 오랫동안 본
   대요. 실제 영인문학관에 오는 사람들은 두세 시간씩 구경해요. 집사람이 우겨서 만들
   었고 지금도 혼자 운영하는데 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계속 유지되도록 하자면 사회
   법인을 만들어야할 거예요. 개인 자료지만 공익적인 것이고 오래 남도록 해야 할 테니
   까요.

  - 요즘 주력하시는 일은? 중앙일보엔 매일 출근하시는지요.

   일본 신조사에서 봄에 `한중일 비교문화론'이 나와요. `가위 바위 보론'이지요. 가위 바
   위 보 놀이에선 절대 승자가 없어요. 한중일 세 나라는 가위 바위 보처럼 다 약점과 강
   점이 있어 서로 보완적인 관계로 가야 한다는 내용이지요. 한때는 중국, 한때는 일본이
   아시아를 지배했지만 이제는 삼국이 각기 다른 능력과 개성으로 순환관계를 가져야 한
   다는 겁니다. 중앙일보엔 매일 나오지만 자유롭게 내 일을 해요. 직장이라기보다 삶터
   인 셈이에요.

  - 마지막으로 서울대가 보다 발전하기 위해 중점을 둬야 할 부분이 있다면.
 
   일본에서는 도쿄대학을 비롯한 국립대학을 특수 법인화했어요. 서울대도 일본의 예를
   참고해볼 필요는 있지요. 국립이라는 간판 아래 관료조직처럼 움직이지 말고 사립대학
   처럼 움직여야 자체 경쟁력도 생길 거예요. 내 경우 솔직히 서울대 출신이라지만 모교
   에서 강연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서울대 출신도 학교가 이렇게 먼데 다른 사람들은 오
   죽하겠어요. 그게 다 주인 없는 집처럼 돼서 그렇다고 생각해요. 대학의 전통이라는 건
   누가 뭘 개발했고 어떤 일을 했는지 등 졸업생들의 초상화로 이뤄지는 거예요. 학교 곳
   곳에 훌륭한 졸업생들의 모습이 서려 있어야 재학생도 자부심과 동창의식이 생기지요.
   그게 서울대가 사는 길이고요. 서울대 출신인데도 서울대가 멀고 후배들이 서먹한 것은
   국립대학의 관료주의 탓이에요. 조직이나 관료성이 아니라 졸업생들의 얼굴이 있는 대
   학으로 만들어가야지요.

-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朴宰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