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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호 2005년 1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金 芝 烈(60년 美大卒)학교법인 이화예술재단 이사

소묘 실기시험 의기양양하게 치러 입학 캔버스 없어 모래주머니틀 사용하기 `일쑤'

 Annette Messager가 학창시절을 보낸 1960년대만 해도 프랑스 미술계에서 여성작가는 존재에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 드물었다는 글을 읽으며 필자의 학창시절을 더듬어본다.  1956년 부모님의 반대를 꺾고(?) 입학한 미술대학은 나에게 큰 모험이었다. 입시 실기시험 날 연필 소묘 Model은 비로드 치마 저고리를 입은 여인이었다. 얼마나 열심히 입학 시험을 위해 갈고 닦았던가. 실력을 발휘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의기양양하게 숨쉴 틈도 없이 그려 나갔다.  그 당시 서울예고에는 4명의 미술과 지망생이 있었고, 선생님들은 金秉騏ㆍ權玉淵ㆍ白文基화백과 같은 현역 작가분들로, 선생 수가 학생 수보다 많았다. 나는 너무 행운아였다. 젊고 패기 있는 미술 지망생이었기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그리고, 합격! 온 세상은 다 내 것이 된 것만 같았다.  그 당시 회화과에 입학하면 서양화ㆍ동양화를 동시에 1년간 수업 받아야 했다. 月田 張遇聖, 心汕 盧壽鉉대가의 체본을 받고 화선지도 아닌 싸구려 창호지에 그리고 또 그렸으나 교수님의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서양화 캔버스를 구하지 못해 스스로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모래주머니를 틀에 씌우고 아교를 발라 말린 뒤, 아연화 가루를 린시드유에 개어 발라 마를 때까지 2~3일을 기다려야하는 끈질긴 기다림과 노동이 나를 힘들게 했다.  서양화 실기 시간, 故 宋秉敦ㆍ張旭鎭교수님의 평가는 긴장되는 시간이었다. 너무 진지하게 평가해주시던 두 교수님을 나는 지금도 귀하게 생각하고 있다.  풍경화를 그리려고 인천의 차이나타운까지 기차를 타고 다녔고, 서울 근교의 북한산, 인왕산, 도봉산 등 왜 그렇게도 산을 많이 그렸던지…. 지금은 인체에 몰두해 누드 작업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4학년 졸업작품 준비기간엔 개인 작업실이 없다보니 유일한 공간인 학교의 실기실에서 이젤과 캔버스로 스스로의 공간을 확보하고 그 속에서 몸살이 나서 쓰러질 때까지 밤낮을 잊고 몰두했다.  우리들의 실기실은 법대 도서실과 같은 층에 위치해 있어 머리에 띠를 두르고 대야에 발을 담그고 공부하는 법대생들의 모습을 보며 지나갔었는데, 그들에겐 시끄럽게 떠들며 자유로운 우리들의 발걸음이 짜증스러웠을 게다. 그 때문에 간혹 남학생들 사이에 다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바라던 대로 꿈을 실현했는지 궁금하다.  휴강이라도 있는 날이면 약속한 듯이 모여 대학다방, 특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복잡했던 인사동의 無我 Salon에서 오후 내내 인생과 철학, 그리고 그림을 논했고 아주 보람된 삶을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 때의 친구들 중 文美愛동문을 비롯한 몇 명은 고인이 됐지만, 이젠 원로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尹明老ㆍ鄭晫永ㆍ金炯大ㆍ金鳳台ㆍ金宗學ㆍ方惠子ㆍ李禹換ㆍ韓鏞進ㆍ宋榮邦ㆍ朴演島ㆍ玄淑子ㆍ金時用ㆍ鄭善嬅ㆍ崔愛敬ㆍ姜恩葉ㆍ金載姙 등의 동창들이 있다.  지금도 만나면 흰머리를 날리며, 눈 꼬리에는 주름지어 웃는 그 때의 오랜 친구들이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