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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호 2016년 4월] 뉴스 본회소식

<창간 40주년 특집> 마흔 동갑내기 동문 인터뷰

이정현, 최병준, 정희원, 김혁, 강민정,

1976년 동창신문을 창간하고 올해로 40주년이 됐다. 이에 총동창회 편집부에서는 1976년에 태어난 마흔 ‘동갑내기’ 동문들 중 몇 명을 선정해 전화 및 이메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40세 나이를 가리켜 흔히 불혹이라고 한다. 불혹이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됐음을 뜻해서일까. 인터뷰에 응해준 동문들은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정진하고 있었다. 바쁜 일정에도 정성껏 답을 해준 동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동문들이 사회에서 성장하는 만큼 총동창신문도 40년 후 더욱 발전해 있기를 기대해본다.


질문 :
1. 40년 인생 최고의 톱뉴스를 뽑는다면?
2. 모교를 떠올릴 때가 있다면 언제인지?
3. 선후배 동기와 즐거운 추억이 있다면?
4. 기억에 남는 동창신문 기사를 꼽으면?
5. 동창신문에 바라는 점이나 건의사항은?



“음대 공연소식 많이 알려주세요”

이정현(성악97-03) 한국음악실연자연합회 순수음악분야 이사·성악가


1. 단연 서울대 성악과에 합격한 것입니다. 성악가로서 최고의 무대 중 하나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A매치 겸 남아공월드컵 출정식에서 애국가를 불렀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2. 모교를 떠올릴 때마다 늘 자랑스러웠습니다. ‘서울대 출신’이 어쩌면 짐이 될 수도 있는 타이틀이지만,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든든한 버팀목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행히 모교는 늘 제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줬습니다.
3. 성악과에는 2년마다 개최되는 정기 오페라 공연이 있습니다. , 음대에서 가장 큰 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최고의 성악가로 활동 중인 강병운·조수미·김영환·고성현·김재형·전승현·이용훈 선배님 등 모두 정기 오페라 주역 출신일 만큼 음대에선 큰 행사이고 오디션 경쟁도 치열합니다. 저 역시 꼭 주역을 맡고 싶었는데 대학원 시절 23회 정기 오페라 ‘잔니 스키키’에서 주역으로 공연해 정말 영광스럽고 행복했습니다.
4. 2006년 9월호에 실린 반기문 선배님의 인터뷰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UN 사무총장에 도전하실 때인데, “UN 사무총장이 되면 개혁, 불신 제거에 앞장서겠다.”라고 포부를 밝히셨고 당선 후 지금까지 자신의 포부를 그대로 실천하고 계신데요, 후배로서 정말 존경스럽고 자랑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론 2014년 2월호 동정란에 저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 수상 소식이 실린 것, 2014년 10월호 신간 소식에 제 저서 ‘클래식 상식백과’가 소개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5. 앞으로 ‘동창신문’이 점차적으로 이메일로 전환될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론 각종 매체가 점점 디지털화 되는 추세이고, 자원 절약 차원에서도 앞으로 그렇게 되어야 하겠습니다만, 디지털 매체가 익숙하지 않으신 대선배님들을 위해서라도 지금처럼 종이 신문도 지속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한 때는 X세대라고 불렸던 세대이지만, 역시 신문과 책은 종이로 읽어야 더 집중이 되는 것 같아요. 또 동창신문이 집으로 우송될 때마다 기분도 좋습니다.

음대 출신으로서 한 가지 건의 드린다면 적어도 2주 이상 기간이 남아있는 음대 동문들의 공연소식을 많이 실어줬으면 합니다. 공연 초대권 이벤트나 동문 할인 혜택도 제공하면 더 많은 동문들이 찾아오시지 않을까요.


“동문 스타트업 소개란 있었으면”

최병준(기계항공공학95-99) 지혜로운세상 CEO



1. 졸업 후 IT기업에 근무하다 2008년 서버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회사를 창업한 일입니다. ‘지혜로운 세상’은 기업 대 기업으로 서버시스템을 운용하는 곳으로 대기업 등에 인터넷 전화기반 ARS·팩스, 기업 솔루션 등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2. 저희 또래의 경우 아무래도 학창시절을 돌아보기보다 이제 사회에 정착해 숨 돌리는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적으로는 사업 파트너인 대기업을 비롯해 각계에서 많은 동문들을 뵙고 있습니다. 동창회에 대한 최소한의 참여라는 생각에 평생회비를 납부했는데,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쓰인다는 데 보람을 느낍니다.
3. 저희 학번이 기계항공공학부 통합 후 선발한 1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동기들과 더욱더 끈끈하게 지낼 수 있었고, 1학년 때 과대표를 맡았던지라 동기들 연락을 자주 받습니다. 지금도 대체로 활발하게 모이는 편입니다.
4. 배달될 때마다 한 번씩 훑어보는데 찬찬히 읽어본 적은 없네요. 신문을 받을 때마다 아내가 농담처럼 ‘가짜 대학생은 아니었구나’ 하는 걸 보면 상징적인 의미도 분명 있습니다.
5. 요즘 스타트업을 창업하시는 동문 분들도 많고, 한편으론 소소하게 스타트업 얼리스테이지(성장초기단계) 투자에 관심이 있는 동문들도 계실 겁니다. 동창신문에 동문 스타트업 소개 코너를 마련해 양쪽의 연결고리가 되어주면 어떨지요.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동문 스타트업에게 힘도 되고, 동창회의 취지와도 잘 어울리리라 생각합니다.


“대학 때 동아리 활동 내 삶 바꿔”

정희원(불어교육94-99) 선교사



1. 대학 시절 중앙동아리 JOY를 통해 전혀 새로운 가치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현재 저는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어 전공과는 거리가 먼 직업을 갖고 있지만, 대학 시절 동아리 활동이 제 생애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우리 동문들이 좀더 정직하고 투명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다른 이들을 섬기며 살아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올해는 그런 기쁜 소식을 더 많이 듣게 되면 좋겠네요. 제가 일하는 분야에서는 출신 대학의 영향이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학벌이나 학력보다는 그 사람의 진실한 내면을 보고 서로 교우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모교를 떠올리거나 생각할 때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3. 저희 불어교육과 첫 수업 때, 저희 지도교수님께서 “우리가 왜 불어를 가르쳐야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그때 제가 “사람들이 바벨탑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어요. 그 이후로 제 별명은 ‘할렐루야 소녀’가 됐답니다. 아름다운 별명을 지어주신 교수님과 동기들에게 감사해요.
4. 동창신문이 매달 배달되고는 있지만, 자세히 살펴 읽지는 않는 편입니다.
5. 세대별 관심사가 다른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연령이 있으신 분들이 많이 보시니까 동창신문도 그런 관점이나 내용을 다루는 것 같습니다. 그에 비해 저는 아직 젊은 세대인지 신문이 다루는 기사들에 썩 흥미를 느끼진 못하는 편입니다. 또 총동창회라는 카테고리가 동문 한 개인에게는 너무 큰 것 같습니다. 선뜻 다가가기엔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벚꽃 만발할 때면 모교 그리워”

김 혁(통계94-06) 호서대 응용통계학과 교수



1. 졸업하고서도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그간의 일들 중 첫 번째를 꼽자면 서울대 통계학과에 입학한 것을 들고 싶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하고 싶었던 통계학을 지금까지도 말석에서 계속 할 수 있는 것은 서울대에 입학해서 훌륭하신 교수님들의 지도 아래 선후배들과 함께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사회의 구성원이자 집안의 가장으로 어깨가 무거워지면서 사는 게 지칠 때면 특히 학교 다닐 때가 생각나는 것 같습니다. 요즘처럼 벚꽃이 만발할 때에도 아름다웠던 모교 캠퍼스의 풍경이 문득 그리워지네요.
3. 학창 시절에도 많은 추억이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건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선후배, 동기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새롭게 쌓아가는 기억과 추억들이 아닐는지요.
4.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온 직후부터 동창회 평생회원으로 가입해 매달 동창신문을 받아보고 있습니다. 인상 깊게 읽은 기사들은 많지만 특히 2014년 12월호에 게재된 칼럼 ‘Back to the Basic’ 칼럼이 기억에 남습니다. 모교 법인화에 즈음해 관록 있는 논설위원분께서 기고하신 글이었는데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그럴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5. 동창신문이 창간된 지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동창신문의 존재를 모르는 동문들이 주위에 많습니다.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더 많은 동문들에게 사랑받는 신문이 됐으면 합니다. 저도 동창신문을 알리는 데 일조하겠습니다.


“모교축제 즐거워 동문으로서 뿌듯”

강민정(행대원06-08) 육군 소령



1. 무사히 서울대에서 학위를 받은 게 제 생애 톱뉴스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박사학위는 다른 학교에서 하게 됐는데, 수료만 하고 아직 학위를 받지 않은 게 최종학력을 서울대로 남기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하하하.
2. 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 거 같아요. 2년여 간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저를 가르쳐 주신 교수님들을 떠올리며 그 모습을 롤모델로 좋은 선생이 되고자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3. 저는 석사를 2008년에 졸업해서 학교를 떠난 지 이제 10년이 채 안 됐는데요. 졸업 후 학교를 찾았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작년 공대 축제 때 성시경씨가 학교 축제에 온대서 아직 가지고 있던 학생증을 가지고 축제에 간 적이 있었거든요. 오랜만에 후배들 사이에 섞여 앉아 야광봉도 흔들고, 그리운 캠퍼스의 기운을 받고 행복에 젖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서울대 졸업생인 게 뿌듯한 가을 밤이었어요.
4. 졸업 후 동창신문은 계속 잘 보고 있습니다. 선배님들께서 쓰신 단편소설(콩트)들을 특히 재미있게 봤는데요, 그 중 ‘나를 향해 빛나는 별’이란 글을 감동 깊게 읽었습니다. 어딘가 아직도 나를 향해 빛나는 별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요.
5. 그리운 학교의 소식을 알려주어 늘 감사하구요, 동문들이 동창신문을 통해 서로 모일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주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그때 그 시절’이라는 가제를 달고 XX년 00과 졸업생 모임을 갖게 하고 그 모임을 취재하여 그 시절의 추억을 담는 코너 같은 것을 만들면 좋겠습니다.


포르말린 섞인 봄꽃향기 못 잊어

최혜진(의학97-01) 서울진피부과 원장


1. 우선 서울대학교 동창신문 창간 4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사람의 인생에서 마흔이 주는 의미는 이제 세상에 미혹됨이 없이 비로소 무소의 뿔처럼 묵묵하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음인데, 늘 청년의 세상처럼 에너지 넘치는 소식들로 가득한 동창신문은 더욱 더 힘차게 뻗어나갈 수 있기를 빕니다.

저의 지나온 인생에서 톱뉴스를 꼽으라면 심히 작아지는 삶입니다. 한창 손이 많이 가는 두 아이의 엄마로, 작은 의원의 원장으로 하루의 일상다반사를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제 뇌구조가 상당히 변하게 된 것과 집안일과 병원일을 병행하며 가끔 저도 깜짝 놀랄 정도로 멀티태스킹의 강자, 시간 쪼개 쓰기의 달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 지금도 진행 중인 빅이슈입니다.

2.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제 인생의 큰 성취의 하나요, 자부심입니다. 그 어떤 과보다도 의과 대학의 동기들은 본과 4년 동안 폐쇄적이고 밀접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지켜 볼 수 있는데, 총명하고 열정적인 동기들의 모습을 보며 많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 열심히 하길 잘했구나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자랑스러운 동기들입니다.

졸업 후 레지던트 수련을 받고 피부과 전문의가 되기까지 스승님들의 좋은 가르침을 많이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심하다고만 생각했던 엄한 말씀들이 나이 마흔에야 이해되는 우둔한 제자지만 당시 원로교수님이셨던 고재경 선생님의 열정 넘치는 가르침은 지금도 삶의 순간순간에 생각이 납니다.

때문에 제 인생의 이십여 년에 걸쳐 저를 성장시킨 인연의 바탕이 된 모교는 지금도 제가 살아가는 순간순간을 같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피부과 의원을 개업하면서 말랑말랑하고 예쁜 이름 중에서도 모교의 서울과 제 이름의 자를 따서 투박하게 이름을 짓게 된 것도 어쩌면 이름을 걸고 하는 진료를 하고 싶은 제 자부심이 투영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한 둘이 아니라 일일이 다 꼽기가 어렵습니다만, 지금처럼 꽃내음이 기분좋게 코끝을 간질이는 때가 되면 제 후각의 기억속에 깊이 박혀있는 해부학 실습실의 냄새와 더불어 한 기억이 떠오릅니다. 실습실 창문을 열면 연건동 캠퍼스의 아카시아 향이 솔솔 풍기는 와중에 포르말린의 콧구멍을 뚫어 버릴 것 같은 강한 냄새가 동시에 콧속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각 실험조 중에서 그날 봐야하는 구조물’- 이를테면 무슨 동맥, 정맥, 신경 같은 것들-이 나올 때 까지 조직을 계속 자르면서 발견해 내야 하는 당번이 있습니다. ‘집도의라고 불렀는데 집도의가 수술을 마칠 때까지 나머지 조원들은 오전 강의 노트를 마저 정리하기도 하고 출출함을 달래러 조교님 몰래 잠시 매점 라면을 흡입하고 오기도 하고 쏟아지는 낮잠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구석에서 머리를 잠시 박고 자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포르말린과 아카시아 향이 묘하게 혼재된 공간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신기하기만 했는데 집도의가 수술을 마치면 포르말린 냄새에 코야 뚫리건 말건 구조물을 더 정확하게 보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스무명이 동시에 얼굴을 들이밀곤 했습니다.

4. 남편 이름으로 지금도 집에 동창신문이 꼬박꼬박 옵니다. 저는 평생회비도 냈는데 신문이 오다가 끊겼고 회비 안 낸 남편 앞으로는 지금도 잘 오고 있습니다. ^^

기억에 남는 기사도 한 둘이 아닙니다.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동문들의 에너지에 늘 놀라고 감복하며 가끔 취미 활동으로 사진이나 글 들이 올라오면 그 다재다능함에 또 한 번 놀라게 됩니다.

일전에 저와 같은 해에 입학했던 한 동문의 표범사진을 보았는데 한동안 여행사진’, ‘카메라등등이 지금도 정신없는 제 뇌구조 속에 들어오려고 해서 힘들었답니다. 심장 이식을 두 번 이나 받게 되시는 하형록 회장님의 동사형 삶과 같은 명사의 축사도 저같은 범인에게는 머릿속에 오래 남습니다.

5. 감히 제안은 드리지 못하겠고 40년 동안이나 신문발간에 힘써 주신 많은 분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학교 운동장에서 처음 합격자 명단을 확인했던 그 순간부터 제 인생에 깊이 들어온 모교이기에 신문을 볼 때마다 들뜬 초심과 다부진 다짐이 교차하게 됩니다. 각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시는 동문 여러분들의 지속적인 활약을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