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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4호 2016년 1월] 기고 에세이

판소리의 말

배명훈(외교97-01) 소설가

녹두거리에서


판소리의 말

배명훈(외교97-01) 소설가


책이 완성될 때쯤 되면 작가의 말을 써 달라는 연락이 온다. 특별할 것 없는 부탁이지만 막상 붙들고 앉으면 글이 잘 써지지 않는다. 작가의 말은 소설 본문의 말과는 다른 종류의 말로 쓰는 글이고 잘 해야 부록에 그쳐야 하는 역할이지 절대 소설 화자의 말을 압도해서는 안 되는 글인데, 하필 해답지처럼 책 맨 뒤에 떡하니 붙어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다.


소설의 말이라는 게 있다. 글쓰기에 상당한 재능을 보이는 분들도 막상 소설을 쓰려고 시도해 보면 첫 문장부터 막히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하는데, 다른 이유도 적지 않겠지만 이 소설의 말에 익숙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들 중 하나일 것이다.


소설가들이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이 말은 근대화와 함께 완성되었다. 서구에서 만들어지고, 번역을 위해 최초로 도입된 다음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한 창작 작업을 통해 차차 다듬어지고 완성된 역사적 산물이다. 그렇다고 그 과정을 자세히 알 필요는 없고, 그냥 그렇게 만들어진 말을 잘 구사하기만 하면 된다. 모두가 그 말을 써서 창작을 하고 있으니 다른 가능성을 생각할 필요도 별로 없다. 굳이 분해해볼 필요가 없는 기성품인 셈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종류의 말을 가지고 현대적인 창작물을 만들어내는 누군가를 보고 말았다. 소리꾼 이자람과 판소리만들기자라는 단체의 창작 판소리다. 브레히트를 재해석한 사천가억척가’, 주요섭의 소설을 판소리로 다시 만든 추물/살인이라는 공연까지. 판소리는 오랜 수련이 요구되는 분야이고, 이자람은 빼어난 표현력을 지닌 공연예술가가 틀림없지만 소설가인 내 귀를 먼저 사로잡은 것은 표현력 좋은 소리꾼 이자람보다는 창작자 이자람 쪽에 더 가깝다. 이상한 말을 활용해서 창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인 데다, 어지간히 공부해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능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판소리의 말은 어느 시점에 진화를 멈추고 고정되어버린 말이다. 그리고 그 고정된 시점이 소설의 말이 한창 변신을 거듭하던 시기를 살짝 벗어난다. 상당 부분 근대 이전의 말인 셈이다. 현재 말을 하고 있는 사람과 작중 등장인물, 창작자 사이의 구분이나 거리감, 운문으로서의 특징들, 말의 시제로 표현되는 현재 진행 중인 사건과 말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 표현 등 근대의 말과는 구별되는 특징들이 말의 고고학처럼 보존되어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일 것이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 09-13) 동문


더 신기한 점은 그 말이 단지 보존되어 있는 유물이 아니라 새로운 창작물을 만드는 데에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작동하는 말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대단히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담아낼 수 있을 만큼 훌륭하게 작동하는 말. 그런 점에서 판소리의 말은 다른 종류의 말을 활용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나 같은 창작자의, 욕심에 가까운 관심을 끌어내기에 충분하다.


이자람과 판소리만들기자의 최근작 추물/살인에는 판소리단편선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다. 1부인 추물을 지나 2살인편으로 접어든 다음에야 새삼 그 점이 떠올랐다. 판소리의 말을 활용한 창작의 결과물이 하나의 모범답안으로 귀결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형태로 확장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이었다. 단 두 편을 엮은 공연이기는 했지만 단편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공연은, 그렇게 확장될 공간 어딘가에는 내가 설 곳도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게 만든다. 그렇게 욕심 하나가 늘어간다.


그런데 다른 말을 꼭 익혀야 하나? 소설의 말을 작가의 말로 잠깐 바꿔 쓰는 것조차 번거로운데. 그래도 언젠가는 해야 할 것 같은 일이고, 도망쳐 봐야 결국 다시 돌아올 숙제가 아닐까 싶다. 이미 오래 전에 학교를 졸업하고 10년이나 소설을 쓴 다음에야 다시 한국말을 배우는 일이란, 그런 뛰어난 창작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면 감히 상상도 못했을 번거로움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배명훈 동문은


 2004년 대학 문학상을 받았다. 2005스마트D’과학기술창작문예 단편 부문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타워’, ‘총통각하’, ‘신의 궤도’, ‘가마틀 스타일등을 출간했으며 주류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작가로 평가받으며 한국문학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장편소설 '첫숨'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