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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호 2015년 10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모교 개학 120주년에 '변영만'을 생각한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상찬하는 드문 사상가


홍문기(국사96-00) 모교 120년사 편찬 연구원


2014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동창회는 변영만(卞榮晩, 18891954)을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으로 선정했다. 그가 약관의 나이에 판사를 역임한 수재일 뿐만 아니라 한문학에도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으며 구한말?일제시대 사상계에도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 동생인 변영태(卞榮泰, 18921969)가 이승만 정부의 외무장관이자 국무총리로 영달했고 변영로(卞榮魯, 18981961)가 시인으로 문명을 얻은 것에 비해, 정작 변영만의 면면에 대해서는 아직 서울대인들 사이에서도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서울대인의 업적과 정신을 다시 한 번 기념하고 계승하기 위해 그의 삶에 대한 소감을 짧게나마 나눠보고자 한다.


변영만은 16세인 1904년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여 1905년 제4회 졸업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190612월 최초로 치러진 법관임용시험(法官銓考試)에 합격했으며, 19087월 경성지방재판소 서기, 같은 해 12월에는 광주지방재판소 판사로 임명되었다. 20살의 나이에 법조계의 당당한 일원이 된 것이다. 원래 법관양성소 입학 자격이 20살이었으나 변영만이 나이를 열 살이나 속이고 입학했다는 설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그가 얼마나 우수한 법조계의 수재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1909년 사법권이 일제 통감부로 이관되면서 변영만은 판사직을 버리고 상경한다.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변호사직을 유지했지만 변호사업을 통해 생계를 영위하기보다는 후술하겠지만 주로 문필가로서 활동한 경우가 더 많았다. 다만 1920년 북경 국제변호사대회에 조선변호사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거나 1922년 일제의 대표적인 언론탄압 사례였던 <신생활>, <신천지> 필화(筆禍) 사건에 변호인단으로 참여하는 등 법조인으로서의 능력을 이용해 민족의 독립을 도모하는 일은 쉬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해방이 되자 1950년 개정된 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에 따라 대법원 내에 설치된 특별재판위원회의 재판관으로 법관의 직에 복귀하여 일제잔재청산에 앞장서고자 했으나 곧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무위에 그치게 된다. 1952년에는 법전편찬위원회 위원도 역임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으로 얼룩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끊임없이 고뇌하다가 19546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처럼 변영만은 김찬영(金瓚泳), 홍면희(洪冕熹, 이후의 洪震), 함태영(咸台永), 안병찬(安炳瓚) 등 다른 법관양성소 졸업생들과 함께 구한말,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를 관통하여 민족을 위해 봉사한 서울대인이자 법조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긴 바 있다.


한편 변영만이 사상가이자 문필가로서 민족에 남긴 유산은 법조인으로서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18세의 나이에 세계3괴물과 그 후속편인 20세기의 대참극 제국주의를 저술하여 구한말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줬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 일본의 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분노는 날로 높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아시아 최초로 서구 국가(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정도로 부강해진 일본에 대한 열패감이 늘어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 정서 속에서 일본의 지도를 받아 조선도 속히 문명국(즉 제국주의 국가)의 일원이 되자는 일진회의 주장이 배태된 것이다.


그러나 변영만은 상기의 논설을 통해 일본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로 상징되는 서구국가의 문명, 사실은 자국의 다수 빈민과 식민지 주민들을 노예로 만들어 이룬, 금권정치, 군국정치 제국주의 정치임을 통렬히 논박했다.(<세계3괴물>) 나아가 그 대안으로서 주체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는 국민들이 법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는 국민의 권리적 정신, 법률적 정신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은 일제 식민주의의 함정을 피하면서도 협소한 민족주의의 함정에 매몰되지 않고 현대적 자유민주주의로 발전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로서 높이 평가된다. 변영만의 지기 중 하나였던 신채호를 비롯해 구한말·일제강점기의 많은 사상가들이 그의 논설에서 큰 영향을 받은 바 있다.


이후 그의 사상은 난삽하다 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를 섭렵했다. 그는 정인보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당대 최고의 한학자이자 문인이었으나 다수의 한글 작품도 남기면서 민족 문화 창달에 이바지했다. 나아가 독학으로 영문을 터득하여 셰익스피어, 칼라일, 블레이크, 디킨스, 니체, 괴테, 파스칼, 모파상,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 유럽 최고 문인들의 작품까지 두루 섭렵하고 번역했으며, 한국인들에게 칼라일의 영웅심, 니체의 예언자적 금언, 파스칼의 독실 등을 소개하여 민족 정기를 진작시키고자 했다. 심지어 간디의 불복종 운동까지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비판적이었지만 마르크스에 대해서는 청빈의 모델로서 적극적으로 평가하기도 했을 정도다.


변영만은 자신이 문장과 학문을 닦는 이유를 백성들과 함께 노래하고 곡하면서 더불어 살아 마땅함을 헤아리고 성공에 초연하여 올바르게 죽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법학, 문학, 철학 모든 분야에서 당대 최고 수준의 지식인이었던 그가, 이렇게 쓸쓸한 소회를 밝힌 것은 그가 국망이라는 암울한 시대를 직면했기 때문이다. 같은 법관양성소 졸업생인 홍면희가 상해임시정부 임원으로, 안병찬이 공산당 활동가로, 김찬영이 일제강점기 민족 변호사로서 분투한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학자스럽고 문인답다고 하겠으나, 그만큼 그의 글은 어디에도 휩쓸리지 않고 시대를 앞질러 양심과 정의를 주장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변영만은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에서 동시에 상찬하는, 드문 사상가이자 문인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일제잔재 청산에 대한 논쟁은 현대 한국 사회의 좌우진영논리와 맞물려서 국가적 갈등을 야기하고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으며,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단초는 선진들의 분투를 겸손히 돌아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변영만의 자유분방하면서도 강직한 사상을 다시 한 번 음미하면서 추숭해야 할 모범으로 다시 세울 것을 모교와 사회에 제안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