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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호 2015년 5월] 문화 꽁트

金 萬 玉(국문59 - 63)소설가




 요즈음 나는 신새벽에 잠보다 먼저 깨는 고약한 쓸쓸함과 맞닥뜨리고 난감해 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몸 속 어느 부분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었고 아직 이부자리 속인데도 어느 외딴 곳으로 혼자 떨어져 나온 것 같기도 하다.

 , 이 증세는 이제부터 죽을 때까지 갈 모양이구나.

 옆에 남편 있고, 부르면 언제든지 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자식 있는데 왜 쓸쓸하고 난리지?

 죽음과의 거리가 좁아지고 있다는 신호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이 들면 누구나 다 한다는 주변 정리라는 걸 해야겠다 생각했다.

 따로 정리할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봤자 글로 남긴 흔적들을 정리하는 일일 수밖에.

 우선 죽고 나서 남이 보면 창피할 것 같은 일기장들을 태워버려야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일을 시작하다 보니 일기와 무관하게 낱장으로 여기 저기 끼어있는 수첩 쪼가리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소위 메모라는 것들이었다.

 찢어버릴 건 찢어버리고 버리기 아까운 건 제대로 된 노트에 옮겨 적기로 했는데 그것들을 읽다 보니 버리고 싶은 게 별로 없다는 게 문제였다. 버리고 싶기는커녕 메모할 때의 상황이 생생하게 펼쳐지고 점점 내 몸 속에 활기가 느껴지고 입가에는 서서히 웃음기가 번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장면들, 기가 막히는 장면들, 새삼 화나는 장면들, 그냥 재미있는 장면들.

 버스 차장이 있던 시절의 장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 대학생은 서있고 여대생은 앉아있다. 그들은 동행이다. 어떤 여고생이 버스에 올라 남자 대학생 옆에 선다. 여고생이 다가온 차장에게 가만가만 뭔가를 이야기한다. 남자 대학생이 여대생과 눈짓을 교환하더니 여고생에게 가만히 뭔가를 쥐여 준다. 버스 회수권이다. 여자 대학생의 뒷좌석에 앉아있던 나는 그때야 `!'하고 깨닫는다.

 여고생이 차장에게 차비가 없다고 고백했고 그 말을 들은 남녀 대학생이 눈으로 의논을 한 끝에 남자 대학생이 여고생에게 버스 회수권을 쥐여 준 줄거리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 메모들 중에 두 중학생의 하굣길 묘사도 재미있다.

 어느 길모퉁이에서 멈춰 선 한 녀석이 다른 녀석에게 책가방을 부탁하고 잠시 어딜 다녀오겠다 한다. 두 개의 책가방을 지키다 지친 놈이 제 것만 갖고 가버린다. 교통순경이 길가에 버려진 책가방을 수상히 여겨 가까운 파출소에 맡긴다. 책가방을 검사해본 파출소 경관이 책가방 주인집에 알린다. 아이놈은 오지 않고 책가방만 돌아온 집이 발칵 뒤집힌다.

 이런 메모들은 수없이 많았다. 마치 쓸쓸함을 치유해주는 묘약이 그 메모들 중에 있기나 한 듯 어느새 나는 유쾌해져서 그 메모들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읽기 중독자인 내가 남의 작품들을 읽을 때만큼이나 재미가 쏠쏠했다는 뜻이다. 그 쏠쏠한 재미는 돌아가신 시어머님의 어록들에서 절정을 이뤘다. 물론 그때그때 메모해둔 낱장들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이 세상에 만 백년하고 이틀을 더 머물다 연전에 저 세상으로 가신 시어머니의 어록이 여기저기에 여봐라하듯이 적혀있었던 것이다.

 시어머니는 아무나 붙들고 이야기하기를 유난히 좋아했다. 당신의 자식들은 물론 사돈처녀, 사돈총각, 앞집 아줌마, 뒷집 아줌마, 건넛방 새댁, 그 새댁의 신랑, 모두가 이야기상대로 좋았다. 심지어는 우리 집에서 가사를 도와주던 여성이 지나는 길이라면서 잠시 인사차 방문할 때 이제 그만 보내도 되겠다 싶은데도 기어이 바쁜 며느리에게 밥까지 지어바치게 하고 이야기상대로 붙들어두는 것이었다.

 그럴 때 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살림에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손방인 노인이 이야기하기는 저다지 좋아할까 하며 투덜거리다가도 장지문 저쪽 방에서 들려오는 시어머니의 말들을 놓쳐버리기 아까워 수첩에 적었던 것이다. 일변 흉보고 일변 밥하고 일변 메모하는 그때의 내 모습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물 건너가는 개처럼 상때기를 치켜들고.'

 `콩죽 쑤어먹고 설사난 놈 밑구녕처럼 질질질 씨부린다.'

 `헝겊 먹은 강아지처럼 돌아간다.'

 `저걸 빼낸 여자는 속병 없겠다.'

 `엉덩이 쓸어봐라. 밸 빠져나왔나.'

 `귀 떨어진 건 내일 와서 줍겠다 하고 뛴다.'

 `쇠경 물 건너가는 소리한다.'

 `비행기에서 낙하산 탄 사람들이 검부러기 떨어지듯 떨어진다.'

 `큰집 사람이 은장도 차니까 저는 식칼 차고 나선다.'

 `돼지 오줌통에 바람 넣은 것처럼 부풀어서.'

 `물에 잠긴 용소리를 한다.'

 뚜렷이 할 일도 없으면서 신새벽에 일어나 다른 식구들 새벽잠을 깨우고 밥 재촉하는 사람에게는 `새벽 동자 지어먹고 과거 보러 가냐'고 힐난했다.

 어머니는 이야기 속 상황에 따라 적절한 비유를 썼고 나는 번번이 흉을 보다가도 속으로 감탄을 했던 것이다. 물에 잠긴 용은 어떤 소리를 할까. 앞 못보다는 사람이 물을 건너갈 때는 또 어떤 소리를 낼까?

 시어머니의 말씀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뜻풀이도 하고, 그 상황을 그려보기도 했다. 물에 잠긴 용은 웅얼웅얼하겠지. 앞 못보는 사람이 물 건너가려면 오죽 시끌벅적할까, 하면서.

 그런 내 눈앞으로 살면서 본 여러 유형의 인간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나갔다. 잘난척하고 물 건너가는 개처럼 고개 바짝 들고있는 자가 지나갔고 별 내용 없는 이야기를 끝없이 주절거리며 앉아있는 그, 혹은 그녀도 보였다. 아니 아니 콩죽 쑤어먹고 설사하는 놈 밑구녕처럼 질질질 씨부린다는 대목에서는 무엄하게도 깍지 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무릎을 감싸안고 끝없이 이야기하며 앉아있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시어머니는 살아계실 때 항상 무릎을 감싸안고 양쪽 엄지손가락을 교차시켜 돌리며 끝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으로 남아있으니까.

 그리고 고약하게도 돼지 오줌통에 바람 넣은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뚜렷한 이유 없이 허황한 꿈에 부풀어 살아온 나 자신의 지나온 삶의 일부가 보이는가 하면 헝겊 먹은 강아지처럼 불안하고 초조해서 맴을 돌고 있는 나의 모습도 보였다.

 귀 떨어진 건 내일 와서 줍겠다 하고 비겁하게 도망친 적은 없는가.

 그런 자문을 할 때쯤에는 예기치 않은 자괴감이 밀려왔고, 그것은 신새벽에 나를 덮치는 그 쓸쓸함과 많이 닮은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 돼지 오줌통에 불어넣은 바람처럼 내 몸속에 부풀어있던 유쾌함의 덩어리가 빠지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았다.

 이 따위 쓰레기들을 갖고 무슨 대단한 정리를 한다고?

 와락 쥐고있던 수첩 쪼가리들을 통째로 찢어버릴 참이었다. 내 난폭한 동작을 멈추게 한 것은 `한쪽 눈을 가리세요'라는 문장 하나였다.

 아니, 이게 뭐였지?”

 거기 수첩에 그 글귀가 적힐 때의 장면이 세세히 그려져 있었다.

 사위와 그의 처제인 내 작은 딸과 내가 책 정리를 하다가 잠시 쉬고있을 때였다. 1980년대 마지막 해의 어떤 문학상 수상 작품집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아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수상작의 제목은 `겨울의 환'이었고, 후보작들 중에 내 작품도 끼어있었다. 딸이 말했다.

 엄마는 틀렸어요. 하다 못해 소설 제목이 `겨울의 덫'이나 `안개의 환' 정도는 돼야지, 맨날 멋대가리 없이 무슨무슨 우체국장이니, 아버지의 무슨 손금고니, 돌멩이 두 개니 수상작이 될 리가 있어요?”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뭔가 이상한데 딱히 뭐가 이상한지 알 수 없었다. 최근에 그 애가 `간밤에 천개번둥 때문에 한잠도 못 잤어요' 했을 때 어딘가 이상하긴 한데 꼭 짚어 말할 수 없었던 것처럼 그때도 뭔가 이상하다 생각했던 것이다. `겨울의 환'`겨울의 덫'이라 하며, 단어를 도치시켜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걸 한참만에 깨닫고 웃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그때 듣고있던 사위가 제 처제 말에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그런데 내 사촌 별정우체국장과 아버지의 작은 손금고는 저도 읽었지만 돌멩이 두 개는 처음 듣는데요.”

 형부는 못 읽었어요? 엄마의 작은아버지 한 분이 일제 말 징용에 갔다가 유골로 돌아오셨는데 그 유골함 속에 유골은 없고 돌멩이 두 개가 들어있었대요. 그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제목이 바로 돌멩이 두 개죠. 얼마나 건조하고 멋대가리 없는 제목이에요?”

 왜요? 좋은데요. 건조하긴 해도 사실적 멋이 있잖아요. 오히려 저는 제목이 문제가 아니라 어머님의 사진이 문제라 생각하는 편이에요. 이 책표지에도 보세요. 오십대로 막 접어들 때인데도 지금과 똑같이 할머니 헤어스타일이잖아요. 그 헤어스타일로는 아무것도 안 된다고요. 분위기가 있어야죠. 다음 번에는 어머님도 앞머리를 길러 안 보일 정도로 이마를 덮든지 옆으로 늘어뜨려 한 쪽 눈을 가리세요. 다른 여성 작가들처럼 멋있게요.”

 그때 우리 셋은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말한 장본인이나 나머지 두 사람 다 머리를 길러 한쪽 눈을 가리며 늘어뜨린 내 모습을 상상하다 보니까 터져 나온 웃음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가 한 쪽 눈을 가릴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니까.


 ● 동문은 197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순례기'가 당선돼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 `내 사촌 별정 우체국장', `흔적', `보청기', `그 말 한마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