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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호 2004년 12월] 기고 감상평

서울대 배지 통일 50주년에 부쳐

沈 載 甲(56년 法大卒) 길영희선생기념사업회 회장
 서울대학교 배지(badge)가 통일된 지 올해로 50주년이 됐다. 얼마전 법대동창회로부터 서울대학교 배지 통일에 대해 구구한 설이 많은데 상세한 내용을 밝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이미 50년전의 일이니 당시의 일이 망각되거나 혹은 사실이 잘못 알려질 정도로 긴 세월이 흘렀다고 할 수 있다.  지난 50년간 서울대 배지 통일에 대해 법대 11회 林圭雲동문이 `志學과 耳順'(仁中 濟高 12회 동기회보)에 언급한 바 있으며, 최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1백년사에도 언급됐다.  필자가 과분하게도 법대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 겸 서울대학교 학생총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았던 1954년은 서울대학교가 종합대학으로 된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각 단과대학은 여전히 각각의 배지를 패용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실제 배지 통일에 대한 논의는 꾸준히 있었으나 법대를 위시해 공대, 문리대, 상대, 의대 등은 배지 통일에 대해 반대를 하고 다른 단과대학들은 찬성하는 등 쉽게 일이 진행되지 못했다. 재학생들도 자기 학교 명칭을 `공대', `문리대', `법대'라고만 사용하고 앞에 나오는 `서울대학교' 명칭을 쓰지 않았다. 다른 대학들이 예를 들어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연세대학교 정법대학' 등으로 쓰고 있는데 비해 대조적이었다.  당시에는 학도호국단이 총학생회 역할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전국의 학도호국단 운영위원장들이 모이는 전국학도호국단 중앙상임위원회 같은 모임에서도 서울대학교의 각 단과대학 위원장들은 개별적인 행동으로 일관하는 등 서울대학교 학생으로서의 동질감 내지 일체감 같은 것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1954년은 또한 서울대학교로서는 전후 복구 후 도약의 단계로 진입하고자 총력을 기울이던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미국의 미네소타주립대와 자매관계를 맺어 선진학문과 대학 운영상의 노하우를 배우고자 노력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더욱이 단과대학별로 캠퍼스도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배지의 통일은 종합대학으로서의 서울대학교의 위상을 높이고 재학생들의 동질성을 배양할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서울대학교 앞날의 미래 지향적인 요소로서 배지 통일의 당위성은 중차대한 것이었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짐을 떠맡느냐였다. 필자는 총위원장으로서 제일 먼저 12개 단과대학 위원장들의 모임인 서울대학교 위원장회의에서 이를 제의했다.  당시 위원장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공대 林完澤, 농대 咸鍾源, 문리대 吳世珪, 미대 李敎善, 법대 沈載甲, 사대 孫晋奭, 상대 朴薰培, 수의대 洪在昌, 약대 洪承台, 의대 金容奎, 음대 金 春, 치대 趙根沃.  처음에는 각 대학의 여론 수렴을 실시하기에 난관이 많다는 문제로 쉽게 가결을 못했으나 회의를 거듭하면서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몇 차례 진지하게 난상토론을 거쳐 가결을 보았다.  다음에는 각 대학별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였다. 이때 법대에서 제일 먼저 합의를 도출해냈다. 법대운영위원회 간부인 李炳豪, 金泰卿, 鄭萬榮, 李珍雨, 金桓洙, 都志薰, 姜台中, 金洙烈, 李大淳, 裵 渡, 裵柄于, 琴東信, 李康爀, 南載熙, 崔光律, 崔萬立, 朴英植동문 등이 아젠더(agenda)를 만들어 나갔다.  대의(大義)를 위해 소리(小利)를 버린다는 사명감으로 법대생들이 오랫동안 애착을 갖고 패용하던 법대 고유의 배지를 버린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결국 법대 운영위원회에서 서울대학교 배지 통일안을 추진하기로 제일 먼저 가결을 하여 여타 단과대학에서도 공청회를 열어 학생들의 많은 의견을 듣고 동의를 구하는 등 법대의 뒤를 이어 통일 배지를 사용하는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1955년 3월 6일자 대학신문과 각 단과대학별 교지에 서울대학교 총위원장 沈載甲 명의로 통일 배지 디자인 현상공모 공고를 내게 됐다.  당시 통일 배지의 요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울대학교 상징 마크( )가 들어가야 할 것.  둘째, 배지 안에 각 단과대학 표식이 명칭 혹은 색채로 인식되게끔 할 것.  셋째, 서울대학교의 전통과 학풍을 표현해야 할 것 등이었다.  현상금은 3만원(당시로서는 큰 금액이었다)으로 해 1955년 4월 1일까지 서울대학교 본부 학생과로 제출하는 것이었는데, 재학생뿐 아니라 일반시민까지 참여하여 수백통의 각양각색의 응모가 들어왔다. 서울대학교 학생위원장 연석회의에서 여러 번 심사한 결과 朴正圭(당시 미대 4학년)동문의 아이디어가 당선돼 오늘날까지 쓰이는 배지가 탄생하게 됐다.(대학신문 1955년 5월 23일자 발표)  우여곡절 끝에 오랜 세월의 숙원사업이었던 통일 배지가 탄생되니 당시 1만3천여 명을 헤아리던 재학생들이 각 단과대학별로 장사진을 이루며 배지를 구입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생생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에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통일 배지의 여파는 기대 이상이었던 것 같다. 대외적으로는 서울대학교로 단합해 행동하기 시작했고, 통일 배지 사용이후 지방마다 또 해외동문들도 각 단과대학별로 이루어졌던 동창회 행사가 서울대학교 총동창회로 단일화하고 통일하여 단합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15년후 1969년 2월 12일 서울대학교 총동창회가 창립총회를 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순수했던 당시 동문들의 모교애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