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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호 2015년 5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제중원의 진실



 올해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이 문을 연 지 13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런데 연세대의료원 교목실장 정종훈 교수는 한국일보 기고 `서울대 병원의 역사 왜곡'(29일자 29)을 통해 서울대 병원이 제중원과 관련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과연 제중원의 진실은 무엇일까.

 정 교수는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의 요청으로 제중원이 설립됐다고 기술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1880년대에 통리기무아문, 별기군, 육영공원 등을 설치하며 근대화 프로젝트를 진행한 고종과 조선 정부는 의료 근대화도 추진했다. 1884`한성순보'를 통해 서양의학 교육을 강조했고, 미국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에게 서양식 병원의 설립을 허락했다. 즉 알렌이 등장하기 전부터 고종과 정부는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중원이 조선 정부와 미국 의료선교사들의 이중 협력구조였다는 설명도 사실과 다르다. 제중원은 외아문(지금의 외교부)에 소속된 국립병원이었다. 고종과 정부가 부지, 건물, 행정인력, 예산 일체를 마련했고, 제중원 운영규칙도 작성했다. 당시 洋醫가 없어서 미국 의료선교사들에게 진료를 맡겼지만, 원장은 외아문 독판(장관)이나 협판(차관)이 겸직했다. 알렌 등 의료선교사들도 보고서, 편지 등에서 제중원을 `정부병원(the government hospital)'이라고 기록했다.

 1894926일 조선 정부가 `제중원 운영권을 포함한 모든 권한'을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비슨)에 이양했다는 언급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우선 위탁 배경이 중요하다. 1894년에 동학농민전쟁, 청일전쟁, 갑오개혁이 연이어 발생했다. 특히 7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은 고종과 정부에게 치명적이었다. 이 위기에서 일본에게 제중원을 뺏기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으로 에비슨에게 제중원 운영을 위탁한 것으로, 소유권까지 양도한 것은 아니었다. 에비슨이 향후 제중원 개·보수에 사용한 비용을 조선 정부가 지불하기만 하면 제중원의 모든 자산을 반납하겠다고 약속한 것이 그 근거다. 그리고 1904년 에비슨 등이 세브란스병원을 개원하자, 이듬해 대한제국 정부는 개·보수 비용을 지불하고 제중원을 환수했다.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다는 인식에도 문제가 있다. 제중원 의료진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동함으로써 제중원 운영이라는 경험적 자산이 전수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을까. 국립병원 제중원을 수탁 운영하던 사람들이 자금을 마련해 자기네 병원을 신축하고 독립하면서 제중원을 반환하고는 `세브란스병원'이라는 새 공식 명칭과 `제중원'이라는 종전 근무지의 명칭을 병용한 경우다.

 아울러 정 교수는 `조선 정부'(사실은 대한제국 정부다)가 세브란스병원에 재정 지원을 한 것이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을 계승한 근거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19051906년은 러일전쟁, 을사조약 체결, 통감부 설치로 이어지는 시점인 만큼 세브란스병원에 대한 재정 지원은 일본인들이나 친일관료들의 결정일 가능성이 높다. 결국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을 계승했다는 주장은 자의적인 역사 해석이다. 그렇다면 서울대 병원은 제중원을 계승했는가. 서울대 병원은 제중원의 역사성을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다. 서울대 병원이 제중원으로부터 계승한 가장 중요한 유산은 이렇다. 고종과 정부는 제중원에 두 가지 사명을 부여했다. 청년들에게 서양의학을 가르쳐 유능한 의료인으로 양성하는 것과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것이었다. 백성을 구제하는 집(관청)이라는 뜻을 지닌 濟衆院다웠다. 요약하면 국립병원 제중원의 사회적 책무는 서양의학 도입을 통한 의료 선진화와 전통시대 공공의료의 계승이었다. 이 과제는 130년이 지난 지금 급변하는 의료환경 속에서도 이 땅의 국공립병원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숙명적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