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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호 2015년 5월] 뉴스 본회소식

제 중 원




 제중원을 직접 만들어 운영하고 모든 사람이 찾을 수 있는 병원으로 만든 사람들은 당시 이 땅의 한국인과 조선 정부였다.”

 모교 병원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이 `제중원 뿌리논쟁'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모교 병원 吳秉熙원장은 지난 43일 연건캠퍼스 임상1강의실에서 열린 제중원 130주년 기념식 및 학술강좌에서 제중원이 서양선교사가 아닌 정부의 주도 하에 설립됐음을 강조했다.

 188543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의 개원이 공포된 것을 기념하고자 마련된 이날 행사에서 원장은 식민지 수탈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던 당시 어떤 국가도 이처럼 주도적으로 서양식 근대의학을 국립병원의 형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서 근대화와 새로운 의학에 대한 당시의 열망을 오늘에도 숙연히 기억하자고 말했다.

 이날 전남대병원장과 충북대병원장 등 국공립대병원 대표들은 제중원의 역사와 정신이야말로 오늘날 공공의료와 국공립병원의 모태라며, 앞으로는 모든 국공립병원들이 함께 제중원을 기념하는 자리를 마련하자고 약속하기도 했다.

 기념식에 이어 열린 학술강좌에서는 의학전문가들이 주제발표자로 나와 제중원의 공공성과 모교 병원으로의 연결성을 학문적 차원에서 입증했다.

 모교 병원 의학역사문화원 崔銀暻교수는 `편지사료로 본 국립병원 제중원(1891-1905)'이라는 제목으로 제중원의 운영권 이관부터 환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1만장 가량의 미국 북장로교 편지사료 분석을 통해 발표했다.

 교수는 알렌이 조선에 오기 전에 이미 정부의 병원 설립 제안이 미국 북장로교 쪽으로 전달돼 선교본부에서 헤론과 언더우드의 파송을 준비했으며, 제중원 설립이 갑신정변과 알렌의 민영익 치료에 따른 우발적인 것이 전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빈튼과 에비슨의 제중원 업무 파업은 제중원 운영비에 대한 통제권을 얻기 위한 파업이었다“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갑오개혁 내각 수립의 와중에서 선교지부가 운영권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선교지부는 운영권을 손에 넣은 후 무료진료 원칙을 포기했고 선교본부의 지원과 제중원 운영은 부실했으며 같은 시기 국립병원 광제원에 비하면 더욱 부실했다고 주장했다. 그밖에 1906년 세브란스병원에 대한 대한제국 정부의 지원금은 외국 공사들에 대한 선교지부 로비에 의해 이뤄졌으며 정부의 의지와 무관했다고 밝혔다.

 모교 의대 인문의학교실 黃尙翼교수는 `근대의학 도입과정에서 제중원의 의의'이란 제목의 주제발표에서 서양이나 한국이나 전통시대 짧은 수명과 높은 영아사망률이 근대로 접어들면서 획기적으로 바뀐 점을 강조했다.

 그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 가운데에 근대의학을 도입하려는 주체적 노력들이 있었다한국의 경우 가장 중요한 근대의학 도입 경로는 조선인과 정부의 노력을 높이 평가해야 하며 제중원은 그 중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모교 병원 의학박물관장인 金玉珠교수는 `모교 병원의 역사'에 대한 주제발표를 통해 개항기부터 시작된 국립병원의 역할을 모교 병원이 이어받아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혁신, 노력, 발전해 왔다앞으로도 국가의 중추적 의료기관으로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정신적 가치를 지켜나갈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金南柱기자




 Q : 알렌이 제중원을 설립했다는 주장은 사실인가요?

 A : 그렇지 않습니다. 미국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1884124일 갑신정변 발발 당시 일본인을 제외하면 조선에 거주하던 유일한 洋醫였습니다. 그는 갑신정변 때 큰 부상을 입은 정계의 실력자 민영익을 치료했습니다. 그로 인해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얻게 됐고, 서양식 국립병원의 설립을 편지로 건의했습니다. 이렇듯이 알렌이 제중원 개원에 기여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조선정부는 이미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서양의료의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 알렌의 건의가 도움이 된 것입니다.

 Q :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맞는지요?

 A : 자의적인 역사인식입니다. 제중원 의료진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동함으로써 제중원 운영이라는 경험적 자산이 세브란스병원에 전수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세브란스병원이 직접적으로 제중원을 계승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국립병원 제중원을 수탁 운영하던 사람들이 자금을 마련해 1904년에 자기네 병원을 완공하고 독립한 후 기부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병원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이듬해에는 대한제국의 요청으로 제중원을 반환했습니다. 그러고는 세브란스병원이라는 새 공식 명칭과 제중원이라는 종전 근무지의 명칭을 병용한 경우입니다. 제중원의 브랜드 가치를 이용해 세브란스병원과 선교사업을 활성화하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Q : 그럼 제중원과 모교 병원의 관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A : 고종과 조선 정부는 국립병원 제중원을 설립하면서 특별히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하나는 제중원 의학당을 설립해 총명한 젊은이들에게 서양의학을 가르쳐 유능한 의료인으로 키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백성을 구제하는 집(관청)이라는 뜻을 지닌 제중원(濟衆院)다웠습니다. 요약하면 국립병원 제중원의 사회적 책무는 서양의학 도입을 통한 의료 선진화와 전통시대 공공의료의 계승이었습니다.

 Q : 광혜원과 제중원은 다른 병원인가요? 헷갈립니다.

 A : 같은 병원입니다. 조선 정부는 1885412일부터 廣惠院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2주일 후인 26일에 고종의 재가를 받아 광혜원이라는 명칭을 백지화하고 濟衆院이라는 명칭을 12일로 소급해 사용했습니다. 광혜원이라는 이름에 무엇인가 하자가 발견돼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이름이 된 것입니다. 충북 진천군에 광혜원(한자도 같음)이라는 국립 숙박기관(언제부턴가 지역 명칭이 됨)이 있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릅니다. 현재 국민들 사이에서는 광혜원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근래 학계에서는 제중원이라는 명칭만 사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