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321호 2004년 12월] 오피니언 동문기고

金 鳳 壬(59년 音大卒)서울오페라단장

하숙집 남학생 러브레터 수없이 보내와 발성연습 소리에 의대생들 데모하기도

 이맘때쯤이면 늘 황금빛 은행잎이 노란 카페트처럼 깔려있는 창경원 담 거리를 걸어가며 옛 추억에 잠기곤 한다. 학창시절을 생각하면 머리 속은 형형색색의 꽃밭이 된다. 행복으로 충만했던 시절이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대 음대 주최 전국성악경연대회에서 특상을 받으면서 모교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1955년 3월,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싶다"는 金春洙시인의 시 한 구절을 읊던 18세 소녀가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상경, 모교 성악과에 4년 장학생으로 당당히 입학했다.  경남에서 올라온 필자는 방과 후 매일 3시간 이상 연습을 하고 허기진 배를 달래려 드롭프스 사탕을 먹으며 성균관 뒷산 밑 하숙집으로 돌아가는 게 하루 일과였다. 하숙집에는 여동기와 문리대 남학생 10여 명이 살았는데, 하숙집 아주머니의 배려로 주인방 옆방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었다. 당시 남학생들이 수도 없이 러브레터를 보냈지만 우린 오히려 남학생들이 치근덕거린다고 아주머니께 일러바치곤 했다.  하숙생활을 하던 필자에게는 유난히 음식에 대한 기억이 많다. 하숙집 밥상 국물에 기름 한 덩어리만 들어가도 `우보도광탕'이라고 하고 멸치 두 마리가 뜨면 고래(?) 잡았다고 하면서 맛있게 칼슘을 섭취하곤 했다. 3학년 때 명동국립극장에서 `춘향전'을 공연 한 후 한일관에서 먹었던 비빔밥과 설렁탕 한 그릇은 또 얼마나 맛있던지….   의대생들의 데모(?)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3학년 때부터 의과대학 뒷강당에서 수업을 받고 연습실은 가교사를 만들어 그곳에서 공부하곤 했는데, 우리의 발성연습, 트럼펫 소리, 심벌소리가 의대생들에겐 큰 곤욕이었던 것 같다.  하루는 흰 가운을 입은 의대생들이 `시끄러워 공부를 못하겠다'며 연습실 창문까지 벽돌을 쌓아 올려놓고 무언의 시위를 했다. 의대생들이 대부분 음악을 좋아해 관현악단까지 만들기도 했으나 연습소리는 정작 듣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다.  당시에는 `풍기문란 십삼조'라는 말이 있어 연습실에서 남녀 두 사람이 연습할 때는 반드시 문을 열어놓고 해야만 했다. 집에서 맘 편히 연습할 수 있었던 서울 아이들이 부럽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순수했던 시절이다.  오페라 `춘희'에서 합창단역을 맡았던 이소량 군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지트처럼 드나들었던 명동의 돌체다방에서 함께 음악감상을 하던 `아부나이(위험)'한 철학가들은 나처럼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을지. 아, 문득 떠오르는 교수님 얼굴들.  "선생님, 저 봉임이 지금도 오페라단 이끌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요. 오페라 나비부인 보러 오셨으면 좋겠는데…, 하늘에서 지켜 봐 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