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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3호 2015년 2월] 문화 꽁트

막걸리  




 아내의 술 취향이 백팔십도 달라졌다. “내 입엔 포도주가 맞아하며 십여 년이 넘게 시종 와인만을 고집하던 아내가 홀연 하루아침에 막걸리 애호자가 돼버렸다.

 원래 아내는 술을 못했다. 무더운 여름날, 산행을 마치고 내려와 맥주를 찾으면 지체 없이 대령하기는 하지만 그 쓴 걸 무슨 맛으로 마시냐며 곁에 앉으려 들지도 않았다.

 그러던 아내가 중년 들어 대학 동창 모임이다, 아파트 엄마들 모임이다 하며 하루가 멀다고 뻔질나게 밖으로 나돌더니 어느 샌가 사람이 달라져 소주도 제법 하는 好酒淑女가 돼버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여고동창회 서무 일을 맡아 하면서부터는 은연중 격상해 이런 저런 술 다 마다하고 오로지 와인만을 마셨다.

 명절이나 식구들 생일 때는 물론이요 별것도 아닌 조그만 일에까지 의미를 붙여 아내는 와인 판(?)을 벌였다. 베란다 창 밖으로 초저녁 비가 추적추적 가슴을 적시며 내린다거나, 앞 개울가 수양버들이 봄바람에 는실난실 춤추듯 한들거린다거나, 모처럼 곤줄박이가 산수유나무에 날아와 빨간 열매를 방정맞게 쫀다거나, 뭐 그런 하찮은 일 따위를 갖고도 아내는 냉장고에서 와인 병을 꺼내 들고 와 나를 거실로 호들갑스럽게 불러내 앉히고는 했다.

 그냥 마시는 것도 아니었다. 앞산 마루로 해가 뉘엿이 넘어갈 때면 공연히 슬픈 감정이 든다며 그런 땐 가넷빛이 도는 레 꽁플리스 드 뭐라나 하는 레드와인이 마음을 포근하게 달래준다는 둥, 달무리 진 밤 촉수 낮은 백열등 불빛 아래에선 여운 은밀하게 과일 맛이 나는 진한 루비색의 까버넷 프랑이 기분을 한결 아늑하게 풀어준다는 둥 제법 로맨틱하게 사설을 늘어놓으며 제 한껏 분위기를 잡고는 했다.

 그뿐이면 그래도 들어줌직 하겠는데 이에 더해 와인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고귀한 선물이라고 플라톤이 말했다는 둥, “와인 없는 식탁은 꽃이 없는 봄이라고 서구인들은 말한다나 어쩐다나 하면서 그럴듯하게 유식을 떨 때는 이 사람이 진짜 배달민족의 후예가 맞나 싶게 밸이 시나브로 뒤틀려지기도 했다.

 그런 아내에게 돌연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지난 시월, 여고 졸업 오십 주년 기념여행으로 이박삼일 증도를 다녀오더니 하루아침에 막걸리 마니아로 어마지두 돌변하고 말았다. 사연도 간단했다. 첫날을 몇몇이 가져온 와인으로 기분을 낸 일행이 다음날 저녁엔 그 중 두엇의 발의로 막걸리파티를 열었단다. 오늘이 자기가 막걸리를 사랑하게 된 지 팔십팔일째 되는 날이라며(명백히 고백건대 세상에 하고많은 기념할 날 중에 이런 날이 생길 줄 난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TV 화면 속 창극 `춘향' 공연 녹화 방영에 한창 넋을 빼앗기고 앉아있는 내 앞에 막걸리 술상을 차려 놓으며 그날의 감흥을 녹음기 틀듯 재차 풀어놓는다.

 글쎄 난 막걸리가 그렇게 내 입맛에 맞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첫 잔부터 벌써 입에 착 달라붙어 혀에 달착지근 감기더라고요. 빛깔도 무던해 까탈지지 않고. 와인은 어떨 때 보면 요염하고 매혹적이긴 해도 왠지 도도하고 차갑다는 느낌을 주지 않아요? 그에 비하면 막걸리는 꾸미는 것 없이 소탈해서 더 정이 가는, 정말 우리네 술이란 생각이 들어요. 탄산이 많이 섞여서 그런지 시큼한 맛도 거의 안 나고요. 예전 것과는 사뭇 달라요. 안 그래요?”

 동의를 구하는 아내의 시선을 관자놀이로 받으며 나는 여전히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화면에서는 바야흐로 사또의 분부를 받들어 한양을 향해 떠나는 이 도령을 남원고을 밖 五里亭에서 기다렸다 만난 춘향이 한바탕의 넋두리를 애간장 미어져 내리게 소리하고, 이어 월매가 건네주는 한 소주(寒燒酒)를 이별주로 따르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순간, 갑자기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화면에 옛날의 어느 한 장면이 오버랩돼 어른어른 떠올랐다. x면의 `월매 주점'과 치마폭에 시큼한 막걸리 냄새를 은은하게 묻히고 서성이던 주모가 오리정을 배경으로 현실처럼 재현됐다.

 월매란 별명의 주모와 사이에 있었던 일, 하긴 자신도 확신 못 하는 해프닝이라 고백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고 스스로를 변명하며 비밀로 지켜오고는 있지만 누가 알랴. 우연한 기회에 다른 루트를 통해 비밀이 아내에게 알려지든가, 혹 취해 비몽사몽간에 발설하는 실수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누가 감히 장담하랴. 세상엔 밝혀지지 않는 비밀이 거의 없다고들 하지 않던가. 슬그머니 속이 켕겼다. 혹 알게 되면 아내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무슨 일이 벌어질까. 아득히 지나간 일이라고 그냥 흘려버리고 말까 아니면? 마침 기회도 좋으니 이 자리에서 고백을 하고 용서를 빌어?

 아니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다. , 아니고말고. 증거불충분의 확실치도 않은 범죄는 고백하는 게 아니지. 공연히 긁어 부스럼이 될 짓을 왜 한담. 바보같이. 가슴 저 밑바닥에서 그 옛날의 내가 회회 손사래를 친다. 하늘이 두 쪽 난다 해도 결코 발설 못할 나의 이 막걸리에 얽힌 미스터리를 깊은 심호흡으로 뱃속 저 깊숙한 곳에 가라앉혀 놓고 나서야 나는 평시의 얼굴로 아내를 돌아다봤다.

 보일 듯 말듯 발그레 뺨을 물들인 아내가 얄궂게 웃으며 나를 흘끔거린다. 맥맥한 눈길이 뜨끔하게 내 속 깊은 곳을 찌른다. 갑자기 추워진다. 얼른 막걸릿잔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리듯 한껏 기울여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1973년 가을, 당시 전공의 3년차이던 나는 정부의 無醫面 해소책에 동원돼 충남의 한 작은 면 보건지소에 공중보건의로 근무하며 혼자 지내고 있었다.

 마을엔 찻집과 酒家가 각기 하나씩 있어 한 주일이면 서너 날씩, 일과를 끝내거나 저녁식사를 마친 동네 유지들-우체국장, 파출소장, 농협지소장,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면장과 동네 어른 두엇-이 찻집에 모여 관내에 하루 일어난 일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담소하듯 논의했다. 한두 식경이 지나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으레 주당 서넛은 정례처럼 이웃 주점으로 자리를 옮겨 막걸리판을 벌였다.

 주점은 저녁시간에만 문을 열었다. 사십 이쪽저쪽일까 싶은, 아담한 키에 포실한 몸매를 한 주모는 낮엔 읍내 시댁에 가 있다 하교하는 아들을 맞아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고 난 뒤 들어와 가게를 열었다. 자정이 되면 어김없이 영업을 파했다.

 여름한철 텃밭을 가꾸느라 볕에 그은 얼굴에 보조개를 파며 주모는 손님 누구라 할 것 없이 웃으며 맞았다. 단골이고 자시고가 없었다. 그렇다고 수다를 떨거나 나부대는 편도 아니었다. 손님상에 끼어 앉아 대작하는 때도 월매가 아니라 향단이처럼 새물새물 웃기만 했다. 가끔 재미난 농담에 웃을 때면 실낱 눈썹 아래 반달눈이 초승달로 감겼다. 그래도 주모의 최상 매력 포인트는 역시 가슴이었다. 탁상에 몸을 숙여 음식을 차릴 때 언뜻 저고리 섶 사이로 보이는 살품이 그렇게 매초롬 뽀얄 수가 없었다.

 파견근무를 10여 일 남긴 2월 중순, 그간 정이 들대로 들었던 마을을 떠난다는 생각에 갑자기 울적해졌다. 자연스럽게 발길이 주점으로 향했다. 해는 아직 한 뼘이나 남아 있었다.

 안방에 앉아 화장을 고치고 있던 주모가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느냐 호들갑을 떨며 반색해 맞았다. 불빛 아래 내 얼굴을 본 주모가 웬일로 피부가 그리 까칠하냐며 대뜸 소매를 잡아끌어 불문곡직 경대 앞에 앉히더니 갑자기 누이라도 된 듯 자기가 바르던 크림을 손가락 끝으로 떠내 내 이마, 양 뺨, , 턱에 찍어놓고는 찬찬히, 부드럽게 문질러 넓게 펴 발라줬다.

 그날, 온 저녁내 나는 안방에 따로 앉아 막걸리를 한 말이나 되게 들이켰다. 어느 사이 서창에 떴던 초승달도 지고 밤은 칠흑처럼 깊어갔다. 왜 손님은 그날따라 아무도 들지 않았을까. 어이없어라. 정신이 들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아침도 훨씬 지나 창으로 햇살이 가득 비쳐들고 있었다. 머리맡에는 식어 차디찬 해장국이 소반 위에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이불을 걷고 옷매무새를 살펴보았지만 어제 입은 그대로 딱히 흐트러진 곳은 없었다. 정녕 아무 일도 없었던 걸까.

 마을을 떠나기 전날 있은 송별연 자리에서도 주모는 태연하기만 했다. 낌새를 챌 만한 별다른 표정을 지어보이지도 않았고 비밀을 공유하는 두 사람 사이에만 통하는 고 달큼하고 은밀한 눈길도 건네지 않았다. 평시나 다름없이 웃고 다름없이 말했다. 나 또한 그날 밤 기억을 더듬어도 도무지 어렴풋 아슴푸레하기만 했다. 약간 거칠고 통통한 손가락을 주물럭거린 것도 같고, 저고리 섶에 꼬꾸라지듯 얼굴을 파묻고 고 배릿한 땀 냄새에 반쯤 혼절한 것도 같고, 덤덤하게 마주 앉아 애꿎게 술잔만 비운 것도 같고.

 어쩌자고 나는 그날 밤 혼자인 걸 기화로 안방에 느긋하게 자리 잡고 앉아 호기롭게 말술을 들이켰을까. 딴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던 걸까. 주모를 본 첫 순간부터 내 가슴은 나도 모르게 끓었던 걸까. 주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을까. 떠나오며 써놓고 온 내 유치한 시를 정말 액자에 넣어 걸어놓고 초승달 애틋하던 그 밤을 떠올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