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3호 2015년 2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黃 祐 呂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2)
▶▶ 黃 祐 呂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1) 에서 계속됩니다.
- 모교 이야기로 돌아와서, 법인 서울대가 가는 방향이 맞다고 보십니까. “글쎄요. 제가 답하기에는 조심스럽고요. 멀리 봐서 라이벌을 찾아야 해요. 공룡 멸종이 보여주듯 외로운 천재는 도태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몸집 불리기'라든지 `고독한 천재의 길을 걷겠다'든지 하기보다는 건전한 라이벌을 키워야 해요. 도쿄대-교토대, 옥스퍼드대-케임브리지대, 하버드대-예일대가 있듯이 `서울대만의 서울대'는 안 돼요. 좋은 라이벌을 키워야 해요. 둘이 아니라 셋이면 더 좋다고 보고요. 서울대는 국내에 라이벌이 없으니까 해외 대학과 경쟁하겠다고 하는데, 그래도 국내 라이벌이 필요해요. 이렇게 가다가는 사립대학이 더 우월해질 수 있어요. 라이벌 국립대학이 반드시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좋은 국립대 한두 개는 더 강하게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우리 국력을 감안해도 혼자 하는 것보다 두 개 정도는 있어야 될 것 같고요.” - 朴槿惠대통령께서 `올해를 반값 등록금을 완성하는 해로 만들겠다'고 하셨는데. “반값 등록금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요. 대학에서 공부는 본인의 영달만을 위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개인의 영달만을 위하라고 사회가 몰아붙여서도 안 되고요. 그렇기 때문에 대학생이 필요로 하는 재원을 우리 기성세대가 해줘야 된다 이거예요. 사실은 1백% 해주고 싶은 마음이에요. 하지만 재정이 안 되니까, 또 학생들도 우선 반값만 해주면 된다고 하니까 일단 반값으로 한 거예요. 반값 등록금은 계속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강화해야 돼요. 그래서 대학들이 등록금에 의존하는 걸 낮추도록 해야 돼요. 지금까지는 학생들을 직접 지원했지만 이제부터는 대학을 지원해서 등록금 의존도를 점점 줄여 들어가도록 해야죠.” - 등록금에 대학이 의존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하시네요. “등록금을 동결해 대학을 괴롭히자는 게 아니라 대학을 본격적으로 지원해서 등록금을 올린다는 이야기가 안 나오도록 해야 돼요. 오히려 대학 측에서 `그거 필요 없어요, 더 깎죠' 이렇게 나와야 된다고 생각해요. 궁극적으로 대학은, 재정의 블랙홀이 되는 게 맞다고 봐요. 블랙홀이 에너지가 없는 게 아니잖아요. 언젠가는 폭발적인 에너지를 쏟아내도록, 좀 기다려줘야 됩니다. 너무 야박하게 경제적으로, 경영학적으로 몰아붙이면 안 됩니다. 그 상징적인 게 대학병원인데, 대학병원 보고 흑자 내라고 몰아붙이면 안됩니다. 대학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새로운 이론을 개발하는 곳이 아니에요? 의술을 해나가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자유와 상당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 학교 다닐 때 이야기도 좀 들려주세요. 서울대가 부총리께 준 게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서울대는 저에게 마음의 여유를 준 것 같아요. 정상인으로서의 마음의 여유. 자존감이라고 할까. 정상에 올랐을 때 우리는 숨을 내쉬면서 여유를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잖아요. 두 번째는 국가적 사명감을 심어줬죠. 서울대 와서 이렇게 저렴한 등록금으로, 또 그것마저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도록 만들어준 것은 결국 국민들이 해준 것이니 기본적으로 국가에 대한 보답이 필요하다는 사명감을 심어줬죠.” - 학창시절 이야기도 들려주시죠. “저는 법과대학에 고시 보려고 들어가지 않았어요. 고등학교 시절 교장선생님이 `流汗興國(흐르는 땀이 나라를 부흥하게 한다)'을 언제나 강조하셨어요. 땀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거죠. 그래서 처음에는 농대에 가려고 이과를 선택했습니다. 이과를 선택하고 한참이 지나서 우리 집에는 농토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거예요. 3학년 때죠. 이건 안 되겠다 싶어 문과로 옮겼어요.” - 3학년 때 옮겼다고요. “우리는 2학년 때까지는 입시 교육을 안 받았어요. 그래서 저도 그때까지 검도 배우고 교회 생활하고 책 읽으며 자유롭게 시간을 보냈죠. 문과로 바꾸게 된 동기가 당시 아놀드 토인비 등 역사학자의 책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학과에 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아버님이 취직하려면 상대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셔서 마음이 흔들렸죠. 당시 兪鎭午(법학29졸)선생님이 쓰신 수필에 `별로 재주도 없고 딱히 뭘 해야겠다 정하지 못한 학생들은 법대를 가라'는 글을 접했어요. 이건 나에게 쓰신 글이구나 싶어 그때 법대에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죠. 그리고 반 친구들에게 나같이 재주도 없고 뭘 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사람들은 함께 법대에 가자고 했죠. 친구들이 자존심이 상했는지 아무도 지원을 안 했어요. 저 혼자 지원해 합격을 했죠.” - 문·이과 통합의 1세대네요. “문·이과 통합해도 별 문제 없다는 걸 제가 몸으로 보여준 선구자라 할 수 있죠(웃음). 그런 마음으로 법대에 갔으니 고시가 있는지도 몰랐죠. 대학교 3학년 여름까지 산에 미쳐서 인수농, 노적봉 등 안 다닌 데가 없었어요. 설악산, 화악산 등을 10일 이상 장기 등반하기도 했죠. 산 속에 살다 오는 거예요. 그렇게 살다 보니까 어느 날 군대 영장이 나오더군요. 그때 장래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산에만 있을 수 없잖아요? 당시 법대에 세 부류가 있었어요. 하나는 국가건설을 위한 데모꾼들. 대표적인 사람이 趙英來변호사였죠. 이 친구들이 굉장히 깨인 친구들이었어요. 저는 생각이 거기까지 못 미쳤던 거죠. 산 좋아하고 그러다 보니까. 두 번째가 학자를 목표로 정말 공부만 하는 아이들이었어요. 세 번째가 고시파예요. 저는 고시파도 아니고 등산파였죠. 영장이 나왔을 무렵 島山 安昌浩선생님의 전기를 읽다 `사내 대장부는 가족을 먹일 기술이 필요하다'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죠. 島山 선생님도 이발 기술이 있었답니다. 그걸로 생활비를 벌고 그랬어요. 나도 이발 기술을 배울까 하다가(웃음) 링컨이 변호사로서 생계를 유지한 데 생각이 미쳤어요. 그래서 변호사가 돼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공부를 시작했죠. 몸이 튼튼하고 부모님과 국가에 대한 미안함이 있어서였는지 몰라도 선행 학습한 친구들보다 더 집중력을 갖고 공부했죠. 1학년 때부터 고시 공부한 친구들은 4학년쯤 되니까 몸이 안 좋더라고요. 졸업할 때 5명 붙었는데 제가 거기 포함됐습니다.” - 장관님이 교육의 비전문가라는 지적이 많았는데 들어보니까 바람직한 교육을 받아온 분이네요. 문·이과 통합을 몸소 보여주셨고, 고시도 선행학습 없이 치르고요. “아버님이 독특한 교육철학이 있으셨어요. 절대평가를 하시는 분인데, 80점 이상만 받아오면 좋아하셨어요. 그리고 이 정도면 됐다고 하셨고요.” - 아무래도 수능이 절대평가로 갈 것 같은데요(웃음). “80점만 받으면 20점 여유가 있잖아요. 그 여유 때문에 다양한 걸 할 수 있었어요. 사실 80점만 받으면 고등고시도 붙어요. 고등고시는 60점만 넘으면 되잖아요. 80점이라는 기준이, 사실 아버지가 굉장히 높은 기준을 잡은 거예요.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1등에서 2등으로 떨어지면 낙담하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잖아요. 아버지는 1등 하라거나 100점 받으라고 하신 적이 없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80점 받아서 못 붙는 시험이 없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아이들을 좀 풀어놔야 돼요. 교육부 장관으로서 이런 이야길 하면 오해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저는 아이들을 자연에 풀어놔야 하고 역사 앞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것도 결국 너무 잡아매고, 너무 전공위주만 하지 말고 좀 풀어놓으라는 거 아닌가요.” - 마지막으로 동문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저는 우리 동문들이 단순하고 겸허했으면 해요. 신과 자연, 우주나 이런 원리 앞에는 겸허하고 사람들에게는 단순했으면 싶어요. `Humble before Veritas, Simple before People'이라 할까요? 그러면 서울대 출신은 국민이 바라는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 거예요.” 〈사진·정리 = 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