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2호 2015년 1월] 문화 꽁트
말세야, 말세
전동차는 문을 열어 사람들을 쏟아 내고 나서 그만큼 도로 쓸어 담아 넣은 후 문을 닫았다. 노약자석에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빤질이 청년이 얼른 한 자리를 차지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니까. 귀때기가 새파란 녀석이 노약자석에 가 앉다니. 하지만 세상에는 저런 낯가죽 두꺼운 사람들이 잘 살긴 하지. 노인 세 명이 그 쪽으로 다가가자 여학생 한 명이 일어나서 자리를 비켜 주었다. 참하게 생겼네. 아직도 저런 애들이 있으니까 이 사회가 돌아가고 있는 거야. 그 옆에 앉아 있는 대학생인 듯이 보이는 더벅머리 총각이 고개를 있는 대로 떨어뜨리고 자고 있었다. 셋 중 가장 덜 늙은 노인 한 명이 서 있었다. 빤질이는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빤질이의 멱살을 붙잡아 일으키고 싶었다. 아니야, 빤질빤질한 인상으로 보아하니 호락호락 일어설 것 같지 않아. 당차게 대들 거야. 그러다가 내가 봉변을 당하고 말겠지. 사실 나도 젊은데 내가 무슨 일어나라 마라 할 권한이 있어? 참자, 참아. 아니지, 저 자는 척하고 있는 학생을 깨워서 일으켜야겠다. 밤에 뭣하고 이 벌건 대낮에 저렇게 고개를 처박고 자누? 틀림없이 인터넷에서 게임을 했든가 포르노에 빠져서 밤을 온통 하얗게 샜든가 둘 중 하날 게야.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이따금 시험 준비하느라고 밤을 새운 일이 있었지. 요즘은 그런 녀석들은 없을 거야. 잘 생각하는 건지 모르지. 공부 아무리 열심히 해 봐야 잘 사는 것과는 직결되지 않으니까 말이야. 나처럼 학교에서 1, 2등을 줄곧 다투어 왔건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드니 누가 공부 잘하려고 하겠느냐 말이야.
다음 정거장에서 허리가 꼿꼿한 노인 한 사람이 탔다. 일흔쯤 돼 보였으나 엄해 보이는 표정에서 잦아드는 기력을 꽉 붙잡고 있는 인상이었다. 그가 노약자석으로 갔으나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다. 후덥지근한 가운데 한 줄기 냉기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빤질이는 맞은 편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고, 더벅머리는 여전히 꿈의 인터넷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은 그들을 잠시 못마땅한 기색으로 내려다보고 있더니 돌연 벽력 같은 소리를 냅다 질렀다. 냉큼 일어서지 못해? 한창 새파란 녀석들이 노약자석을 떡 차지하고 앉아서 노인들을 세워 놓고 있다니, 이 녀석은 머리에 쇠똥도 덜 벗겨진 것이 대낮부터 차 안에서 낮잠이야, 낮잠. 요런, 배워 먹지 못한 녀석들 같으니라구. 빤질이는 어이없어해하는 표정으로 입까지 벌리고 노인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더벅머리는 고개를 쳐들면서 눈을 뜨고 입가에 지르르 흐른 침을 손등으로 쓱 닦으면서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노인을 두 사람이나 세워 놓고 앉아 있긴, 이래도 얼른 일어나지 못할까? 빤히 쳐다보긴 뭘 쳐다봐? 척 보면 몰라? 노인은 한 발을 쿵 하고 구르면서 노기를 뱉어냈다. 더벅머리는 그제야 사태를 짐작하고 천근 같은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노인은 전리품을 얻은 듯한 득의의 표정으로 먼저 서 있던 다른 중늙은이에게 그 자리를 권했다. 그 노인은 얼떨떨해하면서 사양하다가 떠밀리듯 자리에 앉으면서도 상하좌우를 살피는 품이 별로 편치 못한 모양이었다.
절반의 승리를 거둔 노인은 여세를 몰아 빤질이에게 한 걸음 다가가서 노기를 고조시키기 시작했다. 아, 이 사람아. 노인네를 처음 봤나. 눈 하나 깜짝 않고 뭘 그렇게 올려다보고 있어? 뭐, 신기한 동물이라도 봤냐? 냉큼 일어서서 자리를 비키란 말이야. 여기 노약자석이라고 씌어 있는 거 안 보여? 노인은 빤질이의 머리 위편에 씌어져 있는 `노약자석'이라는 표시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마구 흔들어댔다. 빤질이는 싱겁게 실소를 터뜨리더니 말했다. 노약자석인 줄 누가 몰라요? 뭣, 이런 사람 보았나? 알면서도 뻔뻔하게 눈 딱 부릅뜨고 앉았구만. 아저씨는 해대는 걸 보니 노약자가 아니에요. 젊은이 못지않게 기력이 대단하시네요. 나는 마음이 몹시 병들어서 사실 약하단 말이에요. 심한 상처를 입어서 쓰러질 것 같단 말이에요. 이쯤 되면 승부가 점입가경이다. 결코 녹록지 않다. 노인은 의외의 강자를 만난 셈이다. 잠깐 움찔하는 듯하더니, 어험, 헛기침을 크게 한 뒤 본격적인 공격의 언사를 퍼붓는 것이었다.
전동차 안은 때아닌 구경거리로 시끌벅적했다. 승객들의 얼굴은 일제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으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지루하던 차에 잘 됐다는 표정, 호기심을 잔뜩 실은 표정, 일행끼리 무슨 말을 주고받으며 이 승부를 점치는 듯이 낄낄거리면서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 집중력이 흐트러진 독서족들의 표정, 못마땅해하거나 짜증스러워하는 표정, 이 쪽을 한 번 힐끗 돌아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이키는 무표정한 표정 등 표정들의 전람회장 같았다.
나의 오른쪽 옆자리의 두 청년은 이제 그 싸움의 심판이 된다. 우리도 젊지만 요즘 젊은이나 학생들 가운데 뻔뻔한 자들이 많긴 많아. 그래도 저 젊은이는 대단하군. 아버지뻘 되는 노인이 저 정도 설치면 더러워서도 비켜줄 일이지, 뭘 저렇게 버티긴 버텨? 오기 싸움이지. 스스로 양보하는 것과 비키도록 강요당하는 것과는 영 딴판이지. 저 노인네도 어지간해. 무슨 권리라도 있는 것 같아. 가급적 노약자에게 자리를 우선적으로 양보하라는 것이지 당당히 요구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 그런 걸 따지면 뭘 하나?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경로사상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 아무리 서구 문물이 많이 흘러 들어왔다 하더라도 노인을 공경하는 것은 인륜의 문제고 그건 좋은 거야. 선진 외국에서도 한국이나 동양의 경로사상은 칭찬한다잖아. 지금 어른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어. 한 사회에서 중추를 이루는 권위는 반드시 지켜져야 돼. 법으로써든 도덕으로써든 말이야. 법으로 강요하기 부적절한 경우라면 전통과 습속과 관습의 힘을 빌려서라도 지키도록 해야지. 옛날에는 동네에서 추방하기까지 했다잖아. 한 마을에서 불량배로 찍히면 어른들의 동네 회의에서 그 동네로부터 추방할 것을 결의해 내쫓는다는 게야. 그렇게 해서라도 질서와 인륜을 지켜야 하는 거야. 저 젊은 사람 아마 자기가 늙으면 예의범절 더 챙기고, 어른 노릇 더 하려고 들지도 몰라. 야, 네가 생각보다 보수적이네. 어른이니 권위니 따지다가 발전이 늦어진 게 한국의 역사요, 동양의 역사야. 모든 분야에서 무질서하지 않을 정도의 자유로운 흐름은 좋은 거야. 우선 혼란스러운 것 같이 보여도 자체 속에서 질서를 저절로 찾아가게 마련이야. 이 친구, 내가 보수적이라서 그런 게 아니야. 내가 고리타분하게 연애결혼을 상놈들이나 하는 짓으로 매도하고 중매결혼을 더 선호하는 사람인 줄 아나? 사안별로 다른 거야. 어떤 부면에서는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는 사상을 지지하다가도 다른 어떤 부면에서는 반대로 보수적이라고 볼 수 있는 사상을 지지할 수도 있어. 그걸 결코 모순이라 할 수 없지.
빤질이는 여태 자리에 떡 버티고 앉아서 서 있는 노인에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가루고 있었다. 서로의 어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노인은 마침내 삿대질을 해대면서 빤질이를 일으켜 세우려고 하고 있었다. 나, 원, 80 평생에 이런 상놈은 처음 보네. 지 애비도 앞에 세워 놓고 자기는 앉아 있을 놈일세. 아무리 나이가 많지만 말씀 좀 삼가시오. `놈'이 뭐요, `놈'이. 너 이놈아.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이나 되노? 남의 나이는 알아서 뭣 하시려오? 나도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수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구?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었냐? 이쯤 되니 승객들 가운데서도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 좀 조용히 합시다. 둘 다 똑 같아요, 똑 같아. 둘이 내려서 싸우시오. 일반석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는 벌떡 일어나서 소리 질렀다. 할아버지, 이 자리에 앉으세요. 젊은 놈이 앉아 있자니 궁둥이에 바늘이 돋는 것 같아서 도저히 못 견디겠소. 그 노인은 뜻밖의 복병을 만난 듯 약간 당황하더니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이 새로운 적을 향해 불을 뿜기 시작했다. 자네도 젊다고 젊은 놈 편 드는 거야? 내가 자리가 탐나서 이렇게 열을 내고 있는 줄 알아? 내가 이래 봬도 기력이 생생해. 종점까지도 서서 갈 수 있어. 다만 노약자석에 노인을 세워 둔 채 새파란 젊은 놈이 앉아 있으니 그러는 거야. 왜 끼어 들어? 노인은 창에 찔린 투우처럼 씩씩대며 좌충우돌할 기세였다.
마침 열차가 정거장에 서면서 문이 열렸다. 빤질이와 더벅머리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함께 내렸다. 노인은 그들의 뒤를 쫓아 두어 걸음 내딛다가 주춤했다. 전동차의 문이 닫혔다. 노인은 갑자기 적수들이 사라지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멍청해져서 문짝을 향해 어깨를 들썩거리며 분을 삭이고 있었다. 도대체 학교에서, 가정에서 뭘 가르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 공중도덕이 이렇게 땅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될려노? 말세야, 말세. 어조는 가라앉고 있었지만 아직 분이 덜 풀린 채 혼잣말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자리에 앉으면서 여기저기 둘러보며 동의를 구하는 듯한 얼굴이었으나 아무도 그를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시끄럽다가 갑자기 조용해진 것에 미처 익숙해지기도 전이었다. 그동안 나의 왼편에서 말 없이 앉아 있던 젊은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바닥만한 종이를 나에게 건넸다. 정말 말세예요, 말세. 말세에는 `자기를 사랑하고 무정하고 사납다'고 성경에 예언돼 있어요. 하지만 말세에 이어서 이 그림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지상낙원이…. 나는 얼떨결에 그 종이를 받고 나서 손을 저었다. 알겠어요. 나중에 읽어볼게요. 저 사람들 때문에 좀 피곤해서. 그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느닷없이 방금 힐끗 본 그림이 떠올랐다. 그것을 애써 지우고 다른 생각을 하려 해도 그 그림이 자꾸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