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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호 2015년 1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한국국제협력단 金 永 穆이사장







 
- 취임한 지 1년 반 정도 지났는데, 주로 어떤 일에 역점을 두셨는지.

 정부로부터 재원을 받아 쓰기 때문에 국민의 세금에 책임지는 기관이 되고자 애썼습니다. 결국 잘 쓰고, 투명한 기관이 되는 일이었죠. 또 선진 원조기관을 비롯해 빌게이츠재단, 록펠러재단 등 여러 저명한 민간 재단과의 협업을 구체화하고 지식을 공유함으로써 기관의 선진화에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질적 성장을 위해 그동안 펼쳐온 활동에 대한 데이터화와 평가시스템 구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제원조투명성기구(IATI) 가입을 정부에 건의해 조만간 가시적 성과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원조 사업의 효율성·투명성을 제고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해외서 코이카에 대한 기대가 상당하다고 들었습니다.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됐던 한국이 반세기 만에 선진국이 됐기 때문에 개발도상국들이 우리나라를 모델로 삼아 발전하고 싶은 욕구가 아주 커요. 원조 선진 기관들도 한국이면 뭔가 하겠다는 기대가 있고요. 우리의 성장 경험을 바탕으로 든든한 길잡이가 돼 줘야죠. 또 한류가 퍼지면서 코이카란 이름으로 사업을 펼치면 우리보다 열 배 돈을 쓰는 일본 못지 않게 성과가 두드러지는 효과를 보고 있죠. 역으로 한국어와 한류를 밑바닥에서 보급하는 사람들이 우리 봉사단원들입니다.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단원이 태국에 50, 베트남에 40명 정도 있습니다. 동남아에서 한국어의 인기는 여기서 상상하는 그 이상입니다.”

 - 개발 지원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높은데, 구체적인 사례를 말씀해 주신다면.

 潘基文 유엔 사무총장의 특보 역할을 했던 미국 컬럼비아 대학의 제프리 삭스 교수는 불평등·빈곤 타파를 앞장서서 주장하시는 분인데, 이 분이 밀레니엄 프로미스라는 재단을 만들어 아프리카 빈곤 지역을 찾아가 활용한 모델이 새마을운동이었어요. 실제로 우리와 협업하자고 해서 새마을운동을 모델로 마을 개발 사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를 비롯해 아프리카, 최근에는 중남미 지역까지 전세계적으로 50여 개국 정부가 농촌 개발을 한국의 새마을방식으로 해달라고 공식 요청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입니다.”

 - 최근 청년뿐 아니라 은퇴하신 분들도 봉사단 지원 열기가 높다고 하던데요.

 경쟁률이 보통 10 1 정도됩니다. 시니어 전문가도 마찬가지고요. 최근에는 CEO급 시니어들이 굉장히 많이 지원하고 있습니다. 吳世勳 前서울시장도 그 중 한 분이죠. 젊은이들의 관심도 높아, 작년에 처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만 대상으로 기능직 봉사단원을 모집해 90명 정도 보냈습니다. 1718세밖에 안 되지만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나라 청년들에게 상당한 도전 의식을 주고 있답니다.”

 - 봉사 기간은 얼마나 됩니까.

 정식 봉사단은 2, 단기 봉사단은 6개월입니다.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여비와 주거 공간을 제공하고요. 자문단으로 가시는 분들에게는 좀 더 나은 대우를 하고 있습니다.”

 - 코이카의 지원 규모는 어느 정도인지.

 우리나라 공적개발원조(ODA) 규모가 유·무상 원조 포함해서 24천억원대입니다. 코이카의 올해 사업비가 65백억원입니다. 전체 ODA30% 정도 되고, 무상원조로만 보면 약 70%를 맡고 있습니다.”

 - ODA 규모가 늘고 있습니다만, 아직 선진국에 비해 작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유엔에서 권하는 선진국들의 기여 비율이 국민총소득(GNI) 대비 0.7%입니다. 영국,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등이 이 비율을 맞추고 있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개발원조위원회(DAC)에 가입한 나라의 평균이 0.32%고요. 우리나라는 0.16% 원조하고 있으니 DAC 평균의 절반밖에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이사장님은 ODA를 어느 정도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나라는 2015년까지 0.25%까지 원조하겠다고 공약했었는데, 경제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0.16%대에서 머무르고 있어요. 딜레마죠. 다만 우리가 실용적·인도적 측면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우리가 세계 10대 무역국이고, 개도국과 무역에서 상당한 흑자를 보고 있으면서 파트너 나라의 어려움을 도외시한다면 지속적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죠. 많은 후진국들이 전쟁·테러·재난 등으로 고통받는 정도는 더 심해졌거든요. 상대적으로 안정된 대한민국이 그런 고통을 외면한다면 한국이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누가 지원하겠습니까.”

 - 업무 추진 과정에서 애로점은 없나요.

 영국이나 일본 특히 중국을 보면 하나로 통합해 ODA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곳에서 지원하고 있어서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지원 규모가 크지 않기 때문에 더욱 합쳐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또 저희들이 1년 동안 통합 프로젝트나 민간 협력 사업 등 1천 건이 넘는 사업을 펼치고, 5천명을 초청해 공부시키고, 45백명을 해외로 내보내서 관리합니다. 420명의 직원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데, 다른 나라가 우리를 보면 굉장히 걱정스러울 정도로 인원 기반이 취약합니다.”

 - 외교관으로서 기억에 남는 일이라면.

 첫 임지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였어요. 보통 그런 나라에 가면 2년 근무 후 선진국으로 보내줬는데 저는 3년 일하고 서울로 왔습니다. 당시 주변의 다른 나라 일도 겸임을 했고요. 사람과 짐승이 같이 사는 것을 보면서 느낀 게 많았죠. 당시 사귀었던 아프리카 친구들도 생각나고. 마음의 고향같이 가슴 한 켠에 자리잡고 있어요.

 외교부에 있으면서 미국과 북한에 관한 일을 많이 했어요. 1994년 제네바에서 북한 핵문제 협상이 타결될 때 협상대표단으로 가 있었고, 이후 북한에 경수로를 지원하면서 북한의 핵프로그램을 동결시키는 구체적인 이행 사업을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를 만들어 진행했습니다. 2006년 제가 KEDO의 사무차장을 맡고 있을 때 KEDO가 문을 닫고 경수로 사업을 접는 결정이 내려졌죠. 신포 경수로 사업 부지에 우리가 상당한 투자를 해서 구조물을 짓고 중장비도 투입했는데 모두 두고 직원들만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죠. 소련이 붕괴되고, 중국의 파워가 약해 북한이 상당히 위축돼 있을 때 모멘텀을 살려 새로운 관계로 나갔으면 세상이 참 많이 달라져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평생 가네요.”

사진·정리 = 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