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9호 2014년 10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대법원이 선물한 ‘週末 문화순례’

널리 알려진 것처럼 기자는 바쁜 직업이다. 주중에 거의 매일 밤늦게 퇴근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제대로 쉬는 경우가 별로 없다. 신문을 만들지 않는 토요일에 지난 주일 쌓인 피로를 간신히 풀고 나면 일요일 점심 때쯤 다시 한 주일을 시작해야 하는 고달픈 나날이다. 그래서 기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가족들에게도 미운털이 박히기 십상이다.
그랬던 기자 생활이 올해 들어 확 달라졌다. 남의 일로만 생각했던 주 5일 근무가 정착됐을 뿐 아니라 매년 절반도 못 채우던 의무휴가까지 모두 찾아먹게 된 것이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지난해 12월 정기상여금과 각종 수당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킨 대법원 판결 덕분이다. 이 판결에 따라 대체휴일 수당이 크게 늘어나게 되자 휴일 근무 인원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회사 방침이 정해진 것이다.
갑자기 매주 이틀씩 쉬게 되자 처음에는 집에 틀어박혀 게으름을 즐기면서 가끔 집앞의 산에 오르며 소일했다. 하지만 점차 집사람의 따가운 눈총을 느꼈고, 할 수 없이 하루쯤은 공연이나 전시를 찾아서 가게 됐다. 그러고 보니 서울시내에는 볼만한 예술 행사가 정말 많았다. 특히 올해는 각종 대형 공연과 전시가 줄을 이어 어느 것을 먼저 봐야 할지 고민할 정도였다.
우선 셰익스피어(1564∼1616) 탄생 4백50주년을 맞아 `맥베스', `노래하는 샤일록', `줄리어스 시저', `템페스트' 등 그의 대표작들이 줄줄이 국립극장과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올랐다. 한 공연을 보고 다음 공연을 기다리며 셰익스피어에 대한 관심이 솟구쳐 관련 저서들을 찾아 읽었다. 그동안 나온 책으로만은 갈증이 채워지지 않아 영어로 된 좋은 책까지 찾아서 아는 출판사에 번역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평소에 보기 힘든 명품 전시도 곳곳에서 열렸다. 봄과 가을에 잠깐씩 수장품의 일부를 좁은 공간에 전시해 관람객들의 애를 태웠던 간송미술관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개관에 맞춰 주요 유물을 한꺼번에 내놓는 `간송문화전'을 두 차례로 나눠 6개월이나 열었다.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과 함께 3대 사립박물관의 하나로 꼽히는 호림박물관은 조선시대 백자 소장품을 역시 두 차례에 걸쳐 전시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이에 질세라 한·중·일의 명품 山水畵를 한데 모았고, 파리 오르세 미술관의 소장품을 가져와 특별전을 마련했다.
20년 넘게 문화부 기자로 일하면서도 잘 느끼지 못했던 문화적 즐거움을 요즘 실감하고 있다. 공연장에서 나눠주는 팸플릿을 꼼꼼히 읽고, 전시회에 가면 도록을 챙기고 도슨트(해설사)의 전시 설명에 귀를 기울인다. 이번 가을에도 리움 10주년 기념전과 국립중앙박물관 청화백자전,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오텔로' 등을 볼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대법관님들,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