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8호 2014년 9월] 문화 꽁트
아담을 위하여
이 짧은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 마리의 개다.(이 개를 나는 아담이라고 부르겠다. 물론 아담이라는 이름에 별다른 의미, 이를테면 종교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미가 함께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다른 이름, 가령 멍멍이나 천둥이, 쫑, 나폴레옹 같은 이름으로 불러도 무방하다.)
개라는 종족은 평균수명이 10년 정도밖에 안 되지만 인간에 비해 훨씬 조숙하기 때문에 올해 세 살인 아담은 개새끼는 아니고 개청년쯤 된다. 그리고 아담은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는 누구인지, 함께 태어난 형제자매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알 수도 없을 뿐더러 알고 싶지도 않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게 개팔자일 테니까. 모르는 게 상책이라던데, 그래서 개팔자가 상팔자인가.
아담이 기억하고 있기로 그의 신세는 태어날 때부터 그다지 축복받은 꼴은 아니었다. 흔히 말하기를 새 생명으로 이 땅에 태어나 마주치는 세상의 첫 모습은 눈부신 햇살이라든가, 어미의 풍만한 젖가슴이라든가, 귀를 간질이는 새들의 지저귐이라든가, 산들바람에 실려온 꽃내음 따위의 찬란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이미지와 결합돼 있다고들 하는데, 그러나 아담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최초의 세상 체험은 옆구리에 와 박히던 발길질의 고통이다. 글쎄 그게 개의 숙명인지는 몰라도 아담의 어린 시절은 온통 그러한 폭력의 흔적들로 얼룩져 있다.
언젠가 한번은 발길로 걷어차는 주인에게 대들었다가 더욱 혼쭐이 나게, 아예 목줄을 기둥에 붙들어 매인 채 그야말로 오뉴월 개 패듯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는 눈물은커녕 비명 한번 내지를 겨를도 없이 혼절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정말이지 그렇게 폭력을 가할 수도 있는 것인지, 또 그렇게 폭력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인지 아담은 지금도 그 엄청난 폭력을 겪고서도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아니, 요게 대들고 있네!” 주인 녀석은 얼굴에 잔뜩 피를 모으며, 얼굴·가슴·다리·등·옆구리를 어디고 할 것 없이 마구 때리고 걷어찼다. 아담이 비명이라도 지르려고 입을 벌리면 “그래, 또 대들어봐라. 아예 죽여서 보신탕으로 먹어줄 테니.” 하면서 고무신짝을 벗어들고 대갈통을 후려갈겼다. “그래, 어디 한번 죽여봐라, 이 백정 놈아. 네놈 뱃속에 들어가서 평생 동안 속창을 긁어줄 테니.” 하고 악을 쓰며 뻗대보았지만, 그놈의 질긴 가죽끈으로 목이 꽉 졸라 매인 상태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웅크리면 웅크린다고 발길질이고, 쓰러지면 다시 일으켜 세워서 깔아뭉갰다. 그뿐만 아니라 네 다리를 꺾어서 꿇어앉힌 다음 허벅지와 정강이 사이에 굵은 각목을 질러 넣고는 위에서 자근자근 짓밟기도 했다.
그날 밤 아담은 마침내 그 집을 뛰쳐나오고 말았다. 말 그대로 야반도주하면서 아담은 자기를 그토록 괴롭힌 주인 녀석의 신발짝을 물고 나와, 그 집 문앞에서 걸레가 다 되도록 질근질근 씹고 뜯고 찢고 발겼다. 아담이 개소년 품세를 겨우 벗어난 때였다.
그뒤로 아담은 그야말로 한 마리의 부랑아였고, 좋게 말하면 정처 없는 방랑자였다. 발길 닿는 대로 걷고 헤매다가 지친 몸 그대로 쓰러져 누우면 그곳이 잠자리였고, 또 이 골목 저 골목 어슬렁거리다가 아무거나 입안에 쑤셔 넣으면 그것이 식사였다. 몸은 비쩍 말랐지만 눈은 형형한 빛으로 번뜩였다. 그러한 몰골 때문에 아담은 간혹 들개나 늑대로 오인돼 추적을 받기도 했고, 현상 붙은 사나이처럼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샅 아래 씨주머니가 여문 뒤에는 지나치는 마을에서 하룻밤 풋사랑을 나눈 적도 몇 차례 있었다. 유랑길에 마주친 마을에 들어가 몇 마디 크엉거리면, 꼬리를 사려 사타구니 밑으로 감추지 않는 사내가 없었고, 꼬리를 흔들어 사타구니를 드러내지 않는 계집이 없었다. 비록 풍찬노숙의 신세일망정 자유분방하고 모험적인 아담의 삶이 그들에게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보인 모양이었다. 이를테면 서부영화에서 먼지바람을 등뒤에 거느리고 나타난 총잡이처럼.
그 사나이처럼 쌍권총을 차고 있지는 않지만 아담은 꽤 성능이 좋은 말총과 물총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말솜씨를 두고 이를 것 같으면 `천일야화쯤 저리 가라'일 정도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하룻밤에도 울고 웃기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재주는 타고났다기보다 그동안 겪어온 거친 생활이 그런 능력을 키워준 셈이다. 아담이 문필가적 재능을 타고났더라면 그는 아마 수십 권의 베스트셀러를 써냈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글로 쓰는 대신 말로 떠벌인다. 그게 성미에도 맞다. 그뿐인가! 물총 하나만은 겉보기에도 그럴듯해 그 속 맛을 보고 싶어 안달하는 계집들이 아담을 차지하려고 저들끼리 싸움판을 벌일 정도다.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서방이 보는 앞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계집이 한둘이 아니었고, 주인집에서 제사나 잔치에 쓰려고 장만해둔 음식을 몰래 훔쳐다 아담에게 갖다 바치는 얼빠진 계집도 부지기수였다.
계집이라고 해서 다 그런 것은 아니다. 가령 시에서 서쪽으로 한참 들어간 어느 마을에서 만났던 계집은 지금도 이따금 눈앞에 어른거리곤 한다. 음식을 잘못 먹고 배탈이 나서 뒹굴고 있는 아담을 안아다가 보살펴주고 오래오래 함께 살자던 순돌이네가 정식으로 짝지어준 계집이었다. 석 달쯤 함께 지냈다.
그러나 결국은 떠돌이병이 도지는 바람에 그 집에서도 나왔는데, 떠나던 날 밤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길로 자신의 퉁퉁 부은 배를 가리키며, 새끼들이 태어나는 것만이라도 보고 떠나라던 계집의 모습을 아담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아마 그녀는 지금쯤 낑낑거리며 젖을 빨아대는 새끼들에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르는 애비의 무용담을 들려주고 있을지도 모른다. 벌써 1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때 아담이 떠나야겠다고 말하자, 그녀는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떠돌이생활이 지겹지도 않아?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면 불편하지도 않아?”
“물론 불편하지. 네 말대로 집도 절도 없이 떠돌다보면 어려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야. 춥고 배고프고 외롭고 무섭고…. 비를 피할 수도 없는 덤불이나 바위틈에서 하룻밤을 떨며 지새기도 해야 하고, 끼니 하나 찾아 먹으려고 산 하나를 꼬박 넘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지. 하지만 몸은 춥고 배고픈데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드넓은 바다, 드높은 하늘이 그득 차오르는 걸 느낄 때가 있어. 뒹구는 돌멩이 하나, 바람에 뒤척이는 나뭇잎 하나, 귓전을 어지럽게 떠도는 풀벌레 하나조차 아주 친밀하게 느껴지는 거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살아 있는 것이든 죽어 있는 것이든, 하나같이 제 나름의 삶을 가지고 있다는 공감을 주고받게 되는 거야. 나보다 강한 것들도 나보다 약한 것들도, 하나의 조화 속에서 잘나고 못난 것 없이 서로 공생할 권리와 책임을 갖고 있다는 생각 말이야. 자연은 본디 그렇게 생겨났어. 인간들은 저들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하지만 아니야, 만물이 평등하게 태어난 거라고. 이 땅, 이 우주는 인간들만의 것이 아니야. 우리도 그들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어. 바꿔 말하면 인간만이 존재하는 우주란 삭막하고 무의미한 사막일 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누가 알아줘? 게다가 현실은 현실이잖아. 인간들은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린 거기에 대항할 힘이 없으니까.”
“그건 힘이 아니야. 폭력이지. 폭력 하면 주먹질이나 채찍질 같은 것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만이 폭력은 아니야. 달콤한 식사와 포근한 잠자리, 이런 것들도 결국은 우리를 길들여 지배하기 위한 미끼, 이를테면 속에 마약이 들어 있는 당의정에 불과해. 오히려 더 위험한 폭력인지도 모르지. 겉만 보고는 속기 쉬우니까. 게다가 한번 맛을 들이면 빠져나오기가 훨씬 힘드니까. 인간들 세상을 봐도 그래. 안락에 젖어 지내는 인간들은 일어설 줄 몰라. 그네들 말로 혁명을 꿈꾸는 것은 언제나 핍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이거든. 그들은 그렇게 일어나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곤 하지.”
아담은 그렇게 안락하고 단란한 가정이 보장된 미래를 포기하고 떠났다.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선 용기 있는 선각자들은 언제나 외롭고 험난한 삶의 길을 걸어가게 마련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세계는 한낱 꿈으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 가능성을 걸고 온몸을 내던지는 이들이 없다면 이 세계의 역사는 아직도 중세의 암흑 속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시작은 언제나 어렵다. 그러나 시작이 없는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담은 그의 이름처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담은 오늘도 도시의 뒷골목이나 시골의 텅빈 들녘을 혼자서 정처 없이 걷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다가 당신과 마주치면 싱긋 웃어 보이며, 함께 가자고 유혹할지도 모른다. 아담을 만나는 이에게 행운이 있을진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