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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호 2014년 9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가을의 입구에 서서



 지난 7월 중순 동창회보 편집부로부터 칼럼 청탁을 받았었다. 워낙 둔필이라 예정된 중국 서안 유적지 답사를 핑계로 거절의 뜻을 밝힌 바 있는데, 이번에 재차 연락을 받고는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필시 동창회의 큰 기둥으로 오랫동안 헌신해오고 있는 편집위원장의 뜻이 들어있지 싶어서이다. 그 분과의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그때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朴生光화백 전시회를 백상기념관에서 열면서, 관장으로 있던 그로부터 `戱去戱來(손일근 編者, 1984, 한국일보사)'라는 책을 자필서명으로 받았다. 그 일로 시작돼 지금까지 만나면 반갑고, 철 지나면 궁금해하는 사이로 지내오고 있다.

 지금 절기는 처서이다. 처서는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고 하고 말()로 상징되기도 한다. 말이라고 하면 `天高馬肥'와 함께 `燈火可親'이라는 구절을 쉽게 연상하게 된다. 책 읽기 좋은 계절이 돌아왔음을 이른다.

 이때를 맞아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선인의 말을 새기며, `시를 읽자 그리고 낭송하자'고 제언해본다. 사람에 따라 신문을 읽는 습관이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큰 제목부터 쭉 훑고 나서 란부터 먼저 읽은 지가 꽤 오래됐다. 조선일보의 `가슴으로 읽는 시·시조', 중앙일보의 `시가 있는 아침', 한국경제 `이 아침의 시'를 지금까지 꼭 찾아 읽으며 휴대폰에 적기도 한다. 지금 꽤 많은 시가 휴대폰에 들어 있어 언제든 다시 읽곤 한다.

 며칠 전에도 조선일보에 나온 萬海 韓龍雲의 시조를 읽었다.

 이순신 사공 삼고/ 을지문덕 마부 삼아 / 파사검 높이 들고 / 남선북마 하여 볼까 / 아마도 님 찾는 길은 / 그뿐인가 하노라.(無題1)

 미술관에 출근하는 수원행 G버스 안에서 중얼중얼 외워보았다. 시를 읽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시가 사회개량의 적극적인 기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시를 사랑하고 자주 낭송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들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태는 소리보다 문자, 대화보다 메시지로 변해 버렸다. 옛날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글을 소리내어 읽었다. 茶山 丁若鏞은 이 세상에서 무슨 소리가 가장 맑고 고우냐 하면, 눈 쌓인 깊은 산속의 글 읽는 소리라고 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시낭송을 해보면 어떨까 해 9월에 낭송할 시로 吳世榮시인의 `9'을 적어 본다.

 코스모스는 / 왜 들길에서만 피는 것일까. / 아스팔트가 / 인간으로 가는 길이라면 / 들길은 하늘로 가는 길. / 코스모스 들길에서는 문득 / 죽은 누이를 만날 것만 같다. // 피는 꽃이 지는 꽃을 만나듯 / 9월은 그렇게 / 삶과 죽음이 지나치는 달. / 코스모스 꽃잎에서는 항상 / 하늘 냄새가 난다. // 문득 고개를 들면 // 벌써 엷어지기 시작하는 햇살. / 태양은 황도에서 이미 기울었는데 / 코스모스는 왜 / 꽃이 지는 계절에 피는 것일까. // 사랑이 기다림에 앞서듯 / 기다림은 성숙에 앞서는 것. / 코스모스 피어나듯 9월은 / 그렇게 / 하늘이 열리는 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