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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호 2014년 8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평생 AS하는 대학



 스코필드박사는 우리 국민들 대부분이 알고 있는 독립유공자이다. 3·1운동을 주도한 33인과 함께 외국인으로 3·1운동을 적극 돕고 세계에 알린 공로가 있기 때문에 34번째 33인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그는 개신교의 선교사로 일본제국주의의 압제 하에 고생하는 우리나라에 와서 자신의 전공분야를 살려서 의사를 양성하는 데 기여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 의대)에서 기초의학분야 교수로 일하면서 마침 3·1운동을 계획하는 분들의 요청을 받아서 적극적으로 3·1운동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가장 추악한 일제의 만행으로 알려진 제암리 교회 학살사건은 스코필드박사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세계인들에게 알릴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 그가 근무하던 세브란스의전도 3·1운동의 핵심적 역할을 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쉽게 3·1운동의 요인들과 연결이 됐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활동 때문에 그 후에 일제에 의해 추방됐고, 고향인 캐나다로 돌아가서 연구활동을 하다가 노년에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하자 다시 돌아와서 이번에는 서울대 수의대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 헌신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모든 우리나라의 매스컴이 애도하고 그의 삶을 칭송했고 그의 무덤은 서울 국립묘지의 독립유공자 묘역에 모셔졌다.

 스코필드박사의 기일에는 서울대에서 매년 크게 그를 기리는 행사를 하고 있다. 스코필드박사의 제사를 서울대가 치르고 있는 것이다. 사립대인 연세대와 국립대인 서울대 양쪽과 관계가 있는 분인데 사립대가 아닌 국립 서울대가 그분의 추모행사를 정성들여 하고 있는 사실은 독립기념관장으로서 참 고마운 일이다.

 필자는 대학원 과정을 서울대에서 수학했다. ·박사 과정 모두 같은 지도교수님의 지도를 받고 학위를 취득했다. 재학 중에 지도교수님은 물론이고 전공 관련 여러 교수님들이 너무 따뜻한 지도를 해주셔서 감사한 마음을 평생 가지고 있다. 살고 있던 전세아파트 주인이 전셋값을 올려서 막막했을 때 은행대출을 주선해 주신다든가, 지방대에 근무하면서 서울에 오면 그냥 보내는 일이 거의 없이 반드시 맥주 한 잔이라도 사 먹여서 보내곤 하셨다. 어떤 괴짜(?) 교수님은 처음 인사드리는 날, 고급 일식집에 데려가시더니 자리를 쉽게 끝내지 못하고 마침내 교수님 아파트에 데리고 가서 재워 보내신 일도 있었다.

 어찌어찌 하다가 필자가 독립기념관의 책임을 맡게 되니까 지도교수님이 자주 독립기념관에 찾아오신다. 교수님은 독립기념관의 경치가 좋아서 오신다지만 제자가 걱정돼 경치 핑계를 대고 오시는 것을 나는 안다. 우리나라 최고의 경영학 구루(Guru)께서 직접 오셔서 고충을 들어주시니 경영자로서 그보다 더 든든한 일이 없다. 최고의 컨설팅을 무료로 받는 기회가 아닌가?

 얼마 전에는 필자의 임기가 거의 다 돼서 대학의 본업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니까 평생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칭찬성 말씀을 하셨다.

 더 할 수 있으면 더 해! 괜찮게 해 왔잖아? 강의를 대신 맡을 사람이 필요하면 내가 해 줄 수 있어! 박사가 맡는 과목은 무엇이든 내가 할 수 있을 테니까.”

 스승님은 요즘 `어느 특별한 재수강'이란 책으로 매스컴에서 크게 소개된 경영대학의 郭秀一교수님이다. 필자에게 해주신 것은 재수강 정도가 아니라 평생 애프터 서비스이다.

 스코필드박사를 잘 모시는 서울대. 제자를 평생 AS하는 서울대. 이것은 세계의 대학 랭킹을 정할 때에는 점수가 되지 않는 서울대의 강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랑할 점이 많은 대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