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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호 2004년 11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밤새워 사회문제 토론하던 기억 `생생'

권총(F학점) 한 두개 차는 게 자랑거리 李 漢 龜(68년 文理大卒)성균관대 인문학부 교수

 `추억의 창'에 실을 사진을 찾기 위해 오래된 사진첩을 뒤지다가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발견하고 문리대 학창 시절을 회상하는 깊은 상념에 잠겨본다.  자세히 보니 모두 낯익은 얼굴들이다. 사진의 오른 쪽 윗부분에 `駱山社會科學硏究會會員一同, 1966'이라는 글자도 보인다. 앞줄 제일 왼쪽에는 지도 교수님의 모습도 보이는데, 지금은 모교에서 은퇴하시고 한국 학술원 회장으로 계시는 金泰吉(사진 ②)선생님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이들 중 사회학과 金善雄(한양대 교수 ⑩)ㆍ朴勝杓③ㆍ鄭鎭一(前한국정보문화센터 사무총장①), 철학과 閔丙謂(경남대 교수⑥)ㆍ崔玹根(스토리문학관 회장④), 정치학과 張達重(모교 교수⑤)ㆍ許 瑄(본회 사무총장⑦), 심리학과 金永哲(태화종합가전 대표⑧)교우와는 지금도 자주 만나면서 우정을 나누고 있지만 몇 사람들은 졸업 후 인생의 진로가 달라 벌써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다.  필자⑨가 이 사진을 문리대 시절의 상징으로 선택한 것은 이 사진이 수많은 전공의 모임과 그들의 다양한 사회 진출 그리고 엘리트로서의 성공적 역할 수행 등 문리대가 창출한 많은 것을 이야기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문리대는 20여 개의 학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되는 기초학문을 함께 하는 `하나의 문리대'라는 의식이 개별 학과를 압도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어떤 전공을 하면서도 문리대생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文史哲이라는 인문학의 기본에다 정치ㆍ경제를 비롯한 사회과학과 기초 자연과학까지 모든 것을 어느 정도는 학습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당시는 요즘 같이 학점 압박도 없었고 어려운 과목들을 수강하다가 한 학기에 권총(F학점) 한 두개 차는 것은 오히려 자랑이 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문리대의 이런 분위기는 이상적인 전인 교육의 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다양한 학문을 전공하고도 자신의 전공과는 관계없이 사회의 각 분야로 진출해 나름대로 일가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기초학문의 인프라를 단단히 깔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우리의 선민의식은 대단했다. 어려운 입학시험을 거쳐 전국에서 선발됐다는 자부심과 아울러, 교육 자체도 개인의 출세나 안일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해야한다는 분위기가 당시 문리대의 암묵적인 교육 이념이었다. 우리가 서로의 하숙집이나 자취집을 순회하듯 돌아가며 소주와 막걸리를 마셔대면서 사회문제로 밤을 새워 토론하고 열불을 토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거리로 뛰쳐나가 시위를 하기도 하는 일들은 일상적인 생활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모이면 가끔 그 때의 일들을 회상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어떻든 이렇게 형성된 사회의식은 지금도 내 삶의 지침이 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개강은 보통 개나리꽃이 만개하는 4월이나 가까이 돼서야 했고, 이유 없이 휴강도 자주 있었고, 5윌말이나 11월말이 가까이 오기 무섭게 종강이었다. 한 학기, 16주 동안 한번의 휴강이라도 하면 큰일나는 줄로 아는 요즘과는 너무나 격세지감이 있다.  우리는 이런 시간적 여유 덕분에 술도 많이 마시고 쓸데없는 호기도 꽤 부렸지만 몇 일, 몇 주고 도서관에서 진을 치고 교수님들이 강의실에서 짚어준 맥을 따라 인류가 축적한 지식을 해면처럼 빨아들이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를 가진 민족이라면 반드시 황금시대를 갖고 있다. 이 시대는 그들 역사에서 언제나 재현하고 싶은 동경의 대상이면서 결코 되돌아 갈 수 없는 이상향이기도 하다. 개인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가 필자에게 인생의 황금시대가 언제였느냐고 묻는다면 지금도 문리대의 학창시절이라고 주저 없이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