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호 2014년 5월] 문화 꽁트
長官이 아닙니다
“허 장관님!”
경쾌한 소프라노 목소리가 들리기에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학교 재단이사장의 맏딸인 기악과 S교수였다. `차기 이사장 후보 0순위'라는 그녀가 무명 교수에 불과한 나에게 먼저 인사를 건넬 줄이야!
나에 대한 이런 호칭은 옳지 않다. 하지만 딱히 틀리지도 않다. 위원장이 장관급인 `민족얼 高揚위원회'의 좌장을 맡았기 때문이다. 지방 사립대학의 교수인 내 이름 뒤엔 `장관급'이라는 타이틀이 붙었고 그때부터 으레 `장관님!'으로 불렸다.
현 정권의 실세인 K실장과 대학 시절 같은 하숙방 룸메이트라는 인연 덕분에 감투를 썼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가난한 수재인 그를 위해 나는 몇 달치 하숙비를 대신 내준 적이 있다. 군부독재에 저항한 그가 교도소를 들락거릴 때 나는 그의 남동생 대학등록금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報恩한 것이다. 어느 신문은 내 프로필을 소개하면서 `K실장의 숨겨진 브레인'이라 표현했다.
허울뿐인 장관급 위원장이지만 위력은 대단했다. 교수 모임에서 내 좌석은 총장과 나란히 앉는 上席으로 배치됐다. 고교 4년 선배인 L학장이 멀찌감치 떨어진 하석에서 뜨악한 눈초리로 나를 째려보는 모습이 어른거려 죄송하고 쑥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곧 익숙해졌다.
재단이사회에서도 나를 예우한다며 운전기사가 딸린 에쿠스 승용차를 제공했다. 어느 모임에 가도 `한 말씀 하시도록' 마이크가 주어졌다. 나는 언제든 즉석 스피치 또는 건배사를 할 준비를 했다. 사회자가 간혹 마이크를 주지 않으면 서운해졌다. 이런 게 권력중독증인가.
지역 기업인들이 참석하는 조찬강연회에 가니 강연료가 5배쯤으로 뛰었다. `선비사상과 리더십'이라는 주제는 마찬가지인데…. 여기저기서 특강 초청이 계속 들어왔다. 좌석은 꽉 찼고 강연을 마치면 나와 사진을 함께 찍자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지방 신문에 기고하는 칼럼의 원고료도 갑절로 올랐다. 칼럼이 게재된 직후 “감명 깊게 읽었다”며 전화, 이메일로 문안하는 독자도 부쩍 늘었다. 이윽고 `중앙지' 몇 군데서도 원고 청탁을 했다. 내 얼굴 사진과 글이 실린 D일보를 본 노모는 그 칼럼을 비닐로 코팅해 선친 묘소에 갖고 가 영전에 올렸다고 한다. 선친은 D일보의 40년간 독자였다.
나의 졸저 `퇴계와 율곡'도 1쇄 재고가 다 팔려 2쇄, 3쇄를 연이어 찍었다. 대학 후배가 경영하는 출판사에서 1쇄 2천권을 찍은 후 거의 팔리지 않아 출판사에 큰 빚을 졌는데 이렇게 단기간에 만회한 것이다. 1쇄 판매분 8백권 가운데 내가 구입해 지인들에게 나눠준 것이 6백권이니 상업판매 실적은 2백권에 불과했었다. 2쇄 책에는 표지를 감싸는 띠지에 `민족얼 고양위원회 위원장 허풍신 장관의 필생의 力作!'이라는 문구가 있어 나를 민망케 했다. 출판사 사장에게 허겁지겁 전화를 걸었다.
“4쇄에서는 띠지를 빼시게! 낯이 뜨거워서….”
“그것 덕분에 책이 팔리는데요? 제 사정도 봐 주십시오. 선배님, 아니 장관니임….”
더 민망한 일도 있었다. 여든이 넘은 숙부께서 종친회 모임에 꼭 나와 문중 어른들께 인사드려야 한다고 强請하기에 난생처음 가봤다. 행사장인 호텔 연회장에 들어가니 `허풍신 장관 취임 축하연'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내가 대통령에게 임명장을 받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확대해 현수막 아래에 걸어놓았다. 정식 장관도 아니고, 취임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내가 마치 진짜 장관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도포 차림의 어느 어르신은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입향조 이후에 문중에 처음 나온 판서”라고 인사했다. 장관급이니 판서라고 부른 것이다. 지금이 조선시대인가?
예측불가한 일이 잇달아 일어났다.
“초등학교 동기회에 꼭 나오거래이. 니가 주인공인께 빠지면 안 된다, 알겄제?”
연구실로 걸려온 전화에서 초등학교 동기회장 정윤희가 그렇게 다그쳤다. 졸업 40주년 홈커밍데이 행사가 열린단다. 졸업 이후 한번도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엔 나가지 않았다. 정윤희라는 여자 동기생의 얼굴도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그래도 그녀의 이름이 낯설지 않은 것은 同名異人인 여배우 때문이다. 스타 정윤희가 활약할 때 동기생 정윤희가 가끔 연상되곤 했었다. 교문에는 `허풍신 장관, 졸업 40주년 홈커밍데이 방문!'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교장을 비롯한 교사들과 동창생들이 도열해 있다가 박수를 쳤다. 교장 옆에 서서 나를 맞은 몸피가 두툼한 여성이 교감인가 알았는데 그녀가 정윤희였다.
“내, 못 알아보겄제?”
과연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변했다. 여배우 정윤희와는 영 딴판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동창회 발전기금으로 1천만원을 내라고 약정서를 들이밀며 강요하다시피 했다.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회식 때 여자 동기생들이 다투어 내게 막걸리 잔을 내밀었다. 그녀들은 나를 둘러싸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얼굴이 불콰해진 어느 여성은 내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었다. 그랬더니 너도나도 내 팔짱을 끼려 난장판이 됐다. 누군가는 나에게 뽀뽀를 하려 덤벼들었다. 그녀들을 밀치고 일어나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왔다.
황당한 일은 끊이지 않았다. 재단이사장이 부부 동반으로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이사장과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우 불편한 관계였다. 재단측에서 내가 몸담은 한국철학과를 폐쇄할 공작을 꾸민다기에 내가 이사장을 만나 얼굴을 붉히며 입씨름을 벌인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이사장 저택으로 가니 부인이 한복을 입고 나와 영접한다. 기악과 S교수는 나와 무척 친근한 사이인 것처럼 반색했고 허우대가 멀쑥한 자기 남편을 소개했다.
“허 장관님, 어서 오십시오. 누추한 곳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장의 존대 어투가 나에겐 어색했다. 아내는 하늘같이 높은 이사장 부부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번쩍거리는 銀製 접시에 담겨 나오는 양식 풀코스 요리…. 이 요리에 잘 어울리는 프랑스 와인을 준비했다는 이사장의 친절한 설명을 들으니 술맛이 떨어졌다. S교수는 어깨가 훤히 드러난 연주복 차림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푸딩과 커피가 디저트로 나왔을 때 이사장은 본색을 드러냈다.
“K실장과 절친한 사이라면서요? 저희 사위… 온실에 자라서 세상 물정도 익히게 할 겸, 사회에 봉사도 할 겸해서 험한 일을 시키려 하는데….”
사위를 K실장에게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번 시장 선거에 나가려 하는데 여당 후보로 공천되도록 힘을 써달라는 것이다. 고급 건달로 보이는 사위가 시장 후보를 꿈꾸다니 가당치도 않다.
“허 장관님께서도 학교에 오래 봉직하셨으니 이제 총장으로 활약하실 때도 됐지요?”
S교수가 내 접시에 과일을 얹어주며 말했다. 자기 남편의 뒷배를 잘 봐주면 나를 차기 총장 자리에 앉혀주겠다는 언질이었다.
며칠 후 신문을 보고 사위가 낙천했음을 알았다. K실장에게 부탁할 처지가 못 된다고 버텼으나 이사장은 끈질기게 나를 압박한 바 있다. 이사장이 섭섭함을 토로하는 연락을 하지 않아 오히려 불안했다.
부활절 아침, 성당에 가려고 넥타이를 매고 새 구두를 신었다. 집을 나서려는데 아내가 어디로부터 전화를 받고 나에게 따져 물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 1천만원을 내기로 약속했느냐고? 그런 일 없다고 시치미를 뚝 떼자 동창회 카페 사이트에 내가 발전기금을 낸다는 소식이 떴다고 한다. 확인해보니 정윤희가 멋대로 그렇게 썼다. 아내는 불같이 화를 내며 전날 일을 털어놓았다.
“대학교수 부인이라면 호의호식하는 줄 아는데 당신이 알다시피 내가 남의 집 가사도우미로 벌써 몇 년째 일하잖아. 어제 잘렸어. 장관 부인을 파출부로 쓰기가 부담스럽다는 거야.”
아내를 겨우 달래 함께 성당에 갔다. 경건한 마음으로 `부활을 맞아 새롭게 태어나라'는 강론을 듣는 중에 S교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뭇 신자들의 눈치를 보며 성당 밖으로 나왔다.
“대낮에 부녀자들과 흥청망청 술판을 벌인 게 사실인가요?”
“초등학교 동창회 모임에 얼굴을 내비쳤을 뿐입니다.”
“지금 인터넷에 술자리 사진이 떠서 학교가 개망신이에요.”
“그게, 사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