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호 2014년 4월] 문화 꽁트
행복과 불행 사이


1.
`행복한 가정은 대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사연이 다르다.' 아무래도 지난 겨울 보충 수업시간에 쓸데없이 이 문장을 입밖에 꺼낸 것이 문제의 시발이었다. 서울에서 동남향으로 한 시간 반쯤 달리면 도착할 수 있는 지방 도시에서, 이십 년 넘게 아무 일 없이 사립고등학교 국어교사를 하며 잘 살고 있던 장 선생은 그런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내가 따지고 든다면, `자, 이래도 내 생각이 틀렸다고 할 텐가'라며 자신 있게 내세울 근거는 없지만, 요 몇 달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결국은 같은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평소에는 전혀 하지 않던 짓, 고교평준화가 되기 전에는 도무지 할 필요도 없던 그런 행동, 이를테면 심오한 의미일랑은 잘 알지도 못하는 고전 속의 명문장들을 외워 가면서 학생들 앞에서 허세를 벌인 게 탈이었다.
2.
보름 전, 장 선생은 아침부터 십 년이 넘은 낡은 차를 급하게 몰아댔다. 집에서 기차역까지는 겨우 15분 남짓, 최단거리로 잡아 간신히 역 앞 교차로 쪽으로 내달리는데 멀리 주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불현듯 뇌리에 스친다. 아차, 오늘이 삼월 첫날이니 공휴일 아닌가. 그렇다면 틀림없이 `만차'일 터. 에잇,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그나마 주차장에 갔다가 차를 돌리는 시간 낭비는 줄일 수 있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아무튼 늦게 출발한 자신을 탓하기보다는 언제나, 아무렴 인구 삼십만이 넘는 도시에 기차역 주차장은 그야말로 손바닥만 한, 그것도 유료주차장이 달랑 하나 있으니 도대체 시민들 알기를 뭘로 아는 거야. 연방 투덜대면서 길 건너 대형마트 주차장으로 차를 몰아 빛의 속도로 차를 세운 장 선생은 허겁지겁 숨이 목에 차서 역사에 들어서며 습관적으로 개찰구 위에 달린 전광판을 확인한다.
다행이다. 연착이다. 그것도 14분이나. 아내가 옆에 있었으면 오늘도 바가지 벼락을 면치 못했을 터. 하지만 이번은 장 선생 홀로 상경길이다. 삼월인데도 바람이 찼다. 잔뜩 어깨를 웅크리고 모직 윗도리의 깃을 세웠다. 기다리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다고 느낀 사람은 장 선생만이 아닌 듯, 젠장 여기 기차는 제 시각에 정확히 출발하는 적이 없어. 철도 파업 때는 적은 인원을 가지고도 오히려 시간을 잘도 맞추더니만, 정작 평소에는 툭하면 연착이야. 중늙은이 몇이 큰 소리로 떠든다. 그래도 장 선생은 상경할 일이 있을 때마다 거의 철도를 이용할 것이다. 장시간 좁은 차 안에 갇히게 되는 운전에 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여러모로 건강에 도움이 될 거라는 판단 때문인데, 자가용은 물론 버스에 비해서도 비용이 저렴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다.
평소 사회 문제에 진지한 의견을 드러내는 것을 극도로 피해 온 그였지만 얼마 전 철도민영화반대 파업 기간 동안에는 하마터면 1인 시위를 벌이는 철도노동자에게 가서 악수를 청할 뻔했다. 뭐 딱히 그들의 주장이나 대의명분에 공감해서라기보다는 지금의 체제가 바뀌는 것을 바라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내에게도 동료 교사들에게도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장 선생은 고교평준화 실시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았다. 우수한 학생들이 들어오면 학교 입장에서는 좋을 수도 있겠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성적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아이들만을 가르치던 시절이 아쉽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장 선생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인생이란 약간의 시행착오는 있는 법. 고민한다고 해결책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날그날 자신의 욕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장 선생은 아들딸이 모두 인(in)서울 대학교에 진학했고, 공대 출신이라 상대적으로 쉽다고는 하지만 그 어렵다는 대기업에 취직까지 했으니 말이다. 선생 월급으로 어떻게 그런 재산을 모았느냐고 부러움 반 시기심 반의 눈초리를 받을 때도 있지만, 칠 년 전에 사 놓은 땅 앞으로 새로운 기차역이 들어서고 아내 이름으로 돼 있는 건물에서 따박따박 월세가 입금되는 것 정도는 자신의 행복한 삶의 부차적인 조건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장 선생은 몇 개월 전부터는 예전에 제대로 읽지 못했던 고전을, 물론 평준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준비도 겸해 다시 읽어보기로 했는데, 서재에서 꺼내든 첫 번째 책이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였다.
3.
기차는 확실히 빨라졌다. 몇 개 간이역을 뒤로 밀어내고 직선화 구간이 늘어난 만큼 상경길은 단축됐다. 한 시간여 흔들리다 보니 종착역이다. 장 선생의 오늘 서울행 목적지는 강남 한복판의 호텔 예식장이다. 팔 년 전쯤 아내와 유럽 쪽으로 패키지여행을 갔는데 일행 중에서 10년 정도 선배인 부부를 만나게 됐고, 워낙 친화력이 좋은 그쪽 사모 덕분에 그 후 몇 차례 국내 여행도 동행하고 서로의 집도 방문하면서 나름 각별하게 지내는 사이가 된 그 선배의 아들 결혼식이 있었던 거다.
시내 전철 타기에도 제법 익숙해져서 예식장 가까운 전철역에서 나와 강남대로에 올라서니 아직 십여 분 여유가 있었다. 거의 일 년여 만에 보는 데도 선배 부부는 더 젊어 보였다. 기술 임원으로 재취업을 한 선배는 예전보다 경제 사정이 나아졌다고 귀띔을 했다. 장성한 아들딸을 둔 터라 장 선생은 예식 절차 하나하나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며느리 잘 보셨네.' 그런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난 번 첫째 아들 때도 그렇더니 이번에도 아주 조신한 인상에 키도 크고 날씬하고 인물까지 좋았다.
그때서야 장 선생은 오늘 예식을 마친 후 아들을 만나기로 한 약속을 기억해냈다. 아들은 중요한 말씀을 드릴 게 있다면서 이틀 전 밤늦게 전화를 했었다. 아들이 장 선생을 만나자고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개는 아이 엄마가 아이들에게 연락해서 만나곤 했지 아들이 직접 요청한 적은 없었다. 물론 예전과는 달라진 상황 때문이기도 하지만 장 선생은 아들이 자신을 챙겨주는 것 같아 대견하고 얼마간 기대도 됐다. 삼성역 부근의 이면 도로에 있는 조용한 카페에서 아들을 만났다.
“아빠 저, 여자 친구와 결혼하려고요.”
“뭐, 그런 이야기를 앞뒤 없이.” 장 선생은 식은땀이 났다. 이럴 때 아내가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까.
“아빠도 우리 둘 사이 다 알고 계셨잖아요. 지난 달 장례식 마치고 아빠가 해주신 말씀, 깊이 생각해 보았어요. 행복한 가정은 대개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사연이 다르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저는 아빠의 설명이 잘 이해가 안 돼요.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한 조건을 스펙 수집하듯 쌓아도 그게 불행해지지 않는 보장은 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보다는 불행해지지 않는 최소한의 조건을 찾는 게 더 현명한 일이란 생각이 들고, 그건 제각각 자기 입장에서 좋은 것만 취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면 제각각 아무리 원하는 것이 달라도 일치하는 점이 있을 거라 생각이 들어요.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아이와 헤어지기 힘들 것 같아요. 그 아이 엄마도 작년에 돌아가시고 아빠도 곧 다시 외국에 나가셔야 한대요. 일 년 후에나 다시 오신다니 어차피 이번에 확실히 두 분 아버님께서 허락해주시면….”
장 선생의 아내는 한 달여 전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심각한 뇌출혈로 인해 입원한 지 사흘만에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아직 젊은 나이였기에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알고 보니 이미 수 년 동안 뇌졸중의 증세를 앓고 있었다고 했다. 어떻게 가족들이 이처럼 무심할 수 있었느냐는 수군거림도 있었지만 장 선생 역시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4.
장 선생은 항상 5호차 69번 좌석을 예매한다. 왜 그런 습관이 들었는지는 모른다. 한 번 그 자리에 타고 다니니 그게 편했고 굳이 바꾸기 싫었다. 토요일에 공휴일 저녁 시간이라 열차는 거의 만석이다. 서울을 빠져나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할 즈음 꼭 아들 나이 또래의 청년이 옆자리에 앉았다. 청년은 뭔가 먹을 것이 든 봉지를 들고 스마트폰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누나, 나는 기차를 타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어. 그게 뭐냐고? 달걀 3개와 사이다 1병을 사지. 왜 그런 줄 알아? 들어봐. 예전에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가끔 기차 여행을 갔어. 엄마는 그때마다 항상 달걀 3개와 사이다 1병을 사 주셨거든. 뭐? … 누나, 나는 말이야. 가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기분이 우울할 때도 달걀하고 사이다를 사 가지고 집에 들어간다고. 왜 그런 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