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호 2014년 4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한국인의 마지막 10년

2001년 9·11 테러 당시 접했던 외신 기사 중에 유독 기억 남는 게 있다. 비행기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에 충돌하기 직전, 기내에 있던 사람들이 휴대전화를 꺼내 지상의 가족에게 “안녕! 사랑했어” 작별 전화를 했다는 게 아닌가. 날벼락 맞듯 불의의 사고를 당했는데도 마치 준비된 영화대본을 읽듯 침착하고 우아하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죽음을 맞다니 …. 상갓집에서 울고불고 목놓아 우는 애도에 익숙한 한국인 눈으로 보자니, 죽음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참으로 사회 문화적 차이가 크다 싶었다. 한데 스위스 출신의 미국 정신의학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는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의 심리적 단계를 `부정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 이렇게 5단계로 규정했다. 수용 단계로 갈수록 성숙한 마음가짐으로 여겨진다. 이 이론을 따른다면, 죽음에 대한 인식 차이는 단지 극복하기 힘든 사회 문화적 특성만은 아닐 수도 있다. 몇 년 전 동유럽으로 출장 갔을 때 비행기 사고를 당할 뻔한 적이 있다. 차창 밖 날씨는 비구름도 없이 멀쩡해 보였는데 착륙을 앞두고 비행기가 30분도 넘게 요동쳤다. 비상시 사용하는 산소호흡기가 절로 떨어지고, 안내방송도 나오질 않았다.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발버둥쳐봤자 소용없고 그저 닥친 운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니, 고작 몇 분 남았을지 모를 소중한 내 마지막을 공포에 질려 허둥지둥 흘려보낼 수는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게 뭘까. 비행기 짐칸에서 휴대전화 꺼내 가족들한테 작별 인사를 해야 하나.'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비행기는 극적으로 착륙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똑바로 걸어가기도 힘들 정도로 강풍이 몰아쳤다. 유럽 전역을 강타한 돌풍으로 거목이 쓰러지고, 집이 부서지고, 수십 명이 죽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비행기 타고 돌풍을 맞았던 것이다. 내게도 언제든 죽음이 닥칠 수 있다는 걸 경험했고, 퀴블러-로스의 심리적 5단계에서 1단계(부정)나 2단계(분노)가 아닌 5단계(수용)로 들어서 보니 9·11 테러 당시 미국인의 작별 전화처럼 도무지 이해가 안 됐던 아름다운 마지막도 마음먹기 따라서는 얼마든 가능했다. 우리 모두 전보다 훨씬 오래 사는 고령사회가 도래했다. 고도 성장 사회에서의 삶은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보다는 더 나은 내일이 늘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성장 고령화의 생존 코드는 다르다. 어제와 별반 나아진 것 없는 오늘을 감사한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장수가 축복인 여유로운 노년도 있지만, 노인 빈곤률이 높은 한국 사회는 고독, 빈곤, 질병을 떼어내기 힘든 이웃처럼 떠안고 사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나이듦을 부정한다고 청년이 되는 것도 아니다. `늙어 가는 한국'도 마찬가지다. 죽음을 `부정'하고 외면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수용'하는 단계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좀더 아름다운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듯, `한국인의 마지막 10년'을 어떻게 하면 좀더 낫게 만들까를 고민하면서 개선책을 찾아나가는 사회로 인식 전환을 해야만 고령화 시대의 산적한 문제에 대해 해답을 찾아나갈 수 있을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