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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호 2014년 3월] 문화 꽁트

지리산 산행기 




 나는 프로 산악인과는 거리가 멀고 그저 가끔 혼자서 또는 지인들과 어울려 가까운 북한산, 도봉산, 청계산, 관악산에 다니는 수준의 아마추어 등산객이다. 공직에서 퇴임한 후에는 고향에 계시는 노모도 보살필 겸 인근에 있는 대학에 강의도 나갈 겸해서 매주 전주 한옥마을에 내려가는데, 어쩌다 주말을 넘겨 길게 머물게 되면 혼자서 당일치기로 지리산을 가곤 한다.

 아침에 생수 한 병, 바나나 두 개, 떡 한 조각을 배낭에 넣고 대문을 나서면 노모께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또 지리산이냐고 물으신다. 노약하신 어머니에게 아들의 산행은 전혀 달갑지 않다. 환갑을 넘긴 아들이 집을 나설 때면 차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시며 버스 값을 쥐어주시는 어머니. 어머니의 주름진 손을 보면 마음이 짠하다.

 전주역에서 여수행 전라선 기차를 타고 1시간쯤 달려 한적한 구례구역에 내리면 멀리 지리산의 장엄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특별히 작정한 행선지가 없으니 구례버스터미널에서 형편 되는 대로 성삼재나 화엄사 또는 피아골로 가는 군내버스를 탄다. 버스로 성삼재까지 가면 쉽게 노고단(老姑壇)에 오를 수 있고, 화엄사로 가면 계곡 등산로를 따라 호젓하게 노고단까지 걸어 올라가 성삼재에서 버스로 하산, 다시 구례구역에서 기차를 되짚어 타고 전주로 귀환한다.

 노고단에 오르면 꼭 할미께 마음 속 소원을 비는데 황당한 것만 아니면 상당히 잘 들어 주신다. 특히 매년 11일 새해 첫날 새벽에는 전주역에서 첫 기차를 타고 구례구역으로 가서 화엄사 계곡으로 노고단에 올라 일출도 보고 소원도 빈다. 교회 집사인 내 아내에게는 극비사항이다.

 피아골은 주로 가을철에 가게 되는데, 계곡의 화려한 단풍에 정신이 팔려 대피소까지 올라갔다가 되짚어 돌아오거나 대피소를 지나 작심하고 임걸령까지 올라가면 역시 노고단 성삼재로 돌아 내려오기도 한다. 묘하게도 피아골 산행에서는 가끔 뱀을 만난다.

 피눈물나는 민족의 비애가 서린 곳이어서 그런지 깊은 계곡의 집채만 한 바위를 타고 넘으며 콸콸 흐르는 시냇물 소리와 빨갛고 파랗게 원색을 뽐내는 초목들의 농염한 향연을 듣고 보고 마시면 인간 세상이 아닌 듯한 환상의 경지에 빠져든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계곡에 그림처럼 아슬아슬하게 걸쳐놓은 현수교들을 건너서 세상과 하직하고 구름안개 덮인 심산유곡의 선경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가면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어느덧 사라진다. 속세의 부질없는 부귀영화 희로애락에 무슨 미련이 남아 있으랴. 환각에 도취해 광대한 지리산의 영봉 한 자락을 기웃거리며, 陶淵明桃花源記에 나오는 전설 속의 복숭아꽃 마을을 찾다가 한 번은 되게 혼이 난 적이 있다.

 수년 전 어느 초가을 9월 초순께였다. 갑자기 지리산에 가고 싶어서 아침에 기차로 전주역을 떠나 구례로 향했다. 마침 구례터미널에서 막 떠나고 있는 쌍계사행 버스를 잡아탔다. 쌍계사 어귀에서 내리자 욕심이 생겼다. 지리산 자락에 이만큼 들락거렸으니 이번에는 좀 희귀한 코스를 가보고 싶었다. 산행 지도를 보니, 칠불사를 거쳐 토끼봉에 오른 뒤 좌회전해 능선을 타고 가다가 삼도봉에서 꺾어 불무장 등으로 내려오면 피아골에서 버스를 타고 구례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전설의 도화마을이 그곳에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

 산행 길 초입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한참 걸어 올라가고 있는데, 탐방안내센터 트럭이 옆에 서더니 어디 가냐고 묻는다. 행선지를 얘기했더니 그쪽은 통제구역이라서 등산은 불가하단다. 그럼 벽소령을 가겠다고 했더니 산행 길 입구까지 태워다 준다. 탐방센터 직원은 내려주면서 반달가슴곰들이 출몰하는 지역이니 가끔 소리를 지르면서 산행하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의신마을을 거쳐 땀을 뻘뻘 흘리며 벽소령에 올라서니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이정표를 보니 좌측 능선은 노고단 방향이고 우측 능선은 천왕봉 방향이다. 우측은 초행길인데 어떻게 할까. 기왕이면 아직 못 가본 천왕봉을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무모하지만 해가 중천을 조금 지났으니 잘하면 천왕봉을 먼발치서라도 볼 수 있으리라.

 능선 길을 마라톤 자세로 뛰기 시작했다.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능선 길은 하나뿐이라서 종주하는 산악인들은 피난보따리 같은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카라반처럼 한 줄로 열을 지어 묵묵히 걷는다. 마치 경건한 성지 순례자들의 행렬 같다. 그래, 인생이란 바로 이들 순례자 같은 자세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앞만 보고 말없이 걷고 있는 순례자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경의를 표했다.

 나는 초경량의 배낭을 지고 있어 나는 듯이 이들을 추월했다. 마른재, 덕평봉, 칠선봉을 지나 정신없이 세석대피소에 당도하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세석은 지리산 능선 중에 중요 지점으로서 네거리에 해당한다. 대피소 규모도 매우 크다. 이미 많은 남녀 등산객들이 차분하게 저녁밥을 짓고 하룻밤을 지낼 준비들을 하고 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대피소는 예약제고 야영 장비는 전혀 없고 배는 고픈데 천왕봉까지는 세 시간 반을 더 가야 한다. 日暮途遠, 옛 중국 고사에 나오듯이 해는 지고 갈 길은 멀었다. 설사 천왕봉에 간들 지리산 산신께서 나를 어디에 재워주겠는가. 이제야 내 정신이 돌아왔다.

 이정표를 보면서 가장 빠른 하산 길을 강구했다. 거림 쪽이 6km 세 시간 거리로 가장 짧다. 두 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처음 가보는 길이지만, 다시 뛰기 시작했다. 산행에서는 대낮 하산 길이라도 절대로 뛰어서는 안 되는 줄 알지만 마음이 급했다. 공포감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몸을 재게 움직여야만 했다. 어두워진 숲과 계곡의 바위와 물을 뛰고 넘으며 하계의 인간 세상을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마침 초승달조차 없어 검푸른 하늘에 수백억 개의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다. 문명세계의 밤은 낮의 연장선 위에 있지만 자연세계의 밤과 낮은 극명하게 다르다. 울창한 숲에서는 금방이라도 반달가슴곰이 뛰어나올 것만 같았다. 오히려 사나운 짐승보다 사람 만나는 것이 훨씬 더 두려웠다.

 문득 梁柱東님의 시를 노래한 가곡 `산길'(朴泰俊 작곡)이 떠올랐다.

 산길을 간다 말없이 / 호올로 산길을 간다 / 해는 져서 새소리 / 새소리 그치고 / 짐승의 발자취 / 그윽히 들리는 / 산길을 간다 말없이 / 밤에 호올로 산길을 / 호올로 산길을 간다




 
중학교 3학년 때 음악선생님이 이 가곡을 가르치며 인생길의 고독과 비애가 담긴 가사라고 일러주셨던 기억이 난다. 사춘기 소년들에게는 전혀 흥미 없을 이 노래와 가사가 촉촉하게 이해될 때쯤이면 이미 중년이 돼 있을 거라고 하셨다. 오늘밤 굳이 산길을 홀로 가야만 하는 비장한 사연은 없지만 누구나 나그네 인생길에 어찌 한 번쯤 이런 고난이 없으랴.

 공포와 어둠을 헤치고 세 시간 가량 숲길을 내려오자 드디어 인가의 불빛이 서너 개 보인다. 마을에 가까이 이르자 저편에서 긴 수염을 기르고 개량 한복을 걸친 도사풍의 한 중년 남자가 어둠 속을 천천히 걸어왔다. 도화마을은커녕 혹시 유령마을로 잘못 들어왔나 싶어서 공포감에 잠시 마음을 졸였다.

 마을에 들어서자 그제야 휴대폰 생각이 떠올랐다. 가족에게 연락하기 위해 휴대폰을 열어보니 이미 오래전에 건전지가 소진돼 꺼져 있었다. 산에서는 휴대폰 건전지가 빠르게 소모된다. 마침 택시 한 대가 마을에 들어 왔다. 구례로 가자고 했더니 구례가 어디냐고 되묻는다. 여기는 경상남도이고 진주택시라서 가기가 어렵단다. 비싼 요금을 내걸고 사정사정해서 겨우 출발했다.

 택시는 지리산 기슭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 구례구역에 내려준다. 마지막 야간열차를 타고 전주역에 도착하니 자정이 훌쩍 넘었다. 하루 종일 전화 연락도 되지 않는 아들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노모는 그래도 아들이 무사 생환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나는 천왕봉을 코앞에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예전에 북한의 묘향산에 갔을 때, 보현사까지만 들어갔다가 일정 때문에 아쉽게 돌아 나왔던 때처럼 마음속에 숙제로 남겨 두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평생 한번은 꼭 가리라고 벼르던 천왕봉에 올라 해묵은 숙제 하나를 풀었다. 지나간 한여름 어느 날, 중산리에 도착해 일박하고 새벽 6시에 산행을 시작해 12시 정각에 상봉 표석을 알현했다. 정상 등정을 허락해주신 지리산 신령께 감사하며 國泰民安과 나의 작은 소원을 빌고 일행과 함께 서둘러 하산했다. 백무동으로 내려와 다시 1박하며 전날 저녁에 했던 것처럼 계곡물에 몸을 담가 천연 거품 목욕으로 피로와 열기를 풀었다. 지리산 주변 향토의 지명들은 어쩌면 이렇게 곱고도 그윽할까.

 인월, 운봉, 와운, 달궁. 이곳에서는 시공을 초월해 신선초의 향기로 숨을 쉬는 것 같다. 마치 보름달 정기를 받아 하늘로 오르는 선녀들의 이름 같다고나 할까. 틀림없이 지리산 깊은 계곡 어딘가에 桃花源記의 전설 같은 마을이 꼭 있을 터인데. 샹그릴라나 유토피아 같은 마을이.

 이제 속세에서 이만큼 살았으니 어쩌다 무릉도원을 찾기만 한다면 돌아 나오지 않고 바로 거기서 눌러앉아 살 생각이다.

 왜 지리산에 가는가.

 잃어버린 신화를 찾아서

 잃어버린 나를 찾아서.